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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Oct 02. 2016

바라봄의 기술

표정이 새겨진 4개의 그림들 

언젠가 사진으로 찍힌 내가 익히 알고 있던 한 여성의 얼굴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좀 놀랬다. 한 번도 내가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진을 곰곰이 들여다보며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이 사진이 (특히 내게는 한 번도 지어 본 적이 없었던) 밝고 사심 없는 미소 띤 표정의 또 다른 사람을 포착해 내었을까? 다름 아니라 아빠의 카메라를 빼앗아 촬영한 아이와 눈길을 주고받은 그 여성의 우연한 순간적 표정으로 탄생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단지 사진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라보았던 '대상의 표정'까지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었다.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우리의 내면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가장 인간적 성격의 표상이 아닐까? 그래서 대체로 타인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표정을 읽는 뇌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바라보는 사람에 의해 그 대상의 표정이 달라지듯, 어쩌면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바라보는 것들을 변화시키며 결부되어 있는 것 아닐까?   


그림 역시, 우리가 바라본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의 내면성과 다양한 관련성을 맺으며 완성되는 관계적인 행위의 연장이다. 즉 그림은 그것이 묘사한 그림 속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적 의식을 전제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문장'이기도 한 것이다. 바라보는 사람이 그림을 포착하여 완성하며 공감할 때 그림의 표정이 비로소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작품이란 '작가가 그린 그림' 이라기보다는 '그림을 보았던 우리 자신'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표정을 다루는 네 명의 젊은 작가가 그린 그러한 성격의 시선이 담긴 그림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더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문지영은 가족과 지인들의 일상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가 보는 가족들은 아마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절대적 조건에 가까운 그 무엇일 것이다. 그것에는 본인 스스로의 지난한 삶의 일상성과 무게가 실려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림에 담긴 회화적인 낙천적 색채감과 붓질을 통해 스스로의 시선 그 자체를 그려내고 있다. 그가 그림으로 꿈꾸는 세계는 보다 더 객관적이며 균형 잡혀 있으며 무엇보다 다채로운 세계이다. 그림은 그렇게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읽어낸다. 생생한 사실성만큼이나 그와 관련을 맺고 작가를 바라보던 주관적인 인상들은 우리 모두의 공감의 이야기로 변모한다.





허술한 옷차림, 알듯 모를듯한 미소, 모든 걸 받아들일 것 같은 온화한 표정이야 말로 가장 익숙하고 빈번하게 우리가 직면하는 얼굴이 아닐까? 박진성의 그림에는 어디 한 군데 우리를 고압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없다. 훈계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언젠가 누구에겐가 지녔던 온화하고 선한 표정만이 담겨있다. 그러한 표정에는 상대에게 구한 용서나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그러한 바라봄이 있다. 고난을 통하여서만 이해할 수 그러한 종류의 미소에는 삶의 다양한 측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보편적 체념의 태도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우리와 나누었던 그러한 표정의 친숙함이 누구나 내재하는 보편적인 감흥을 어루만져 준다.  




 
한충석 작가는 단순하고 과감한 묘사와 색채를 지닌 인물과 표정을 통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외로움과 방어적 현대인의 심상을 잘 그려낸다. 그렇지만 이 인물들은 단지 표정들만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우화로서 시대가 지닌 감정과 은유들까지 담아내고 있다. 개인적인 심상 또는 관계에 대한 복잡 미묘한 시선을 통해 한충석 작가는 순진함과 우울함이 동화적으로 뒤섞인 현대적 감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지만 동물 같기도 또는 신생아의 그것 같기도 하다. 아직은 그 어떠한 곳에 시선을 둘지 모르는 아이의 미성숙한 표정처럼 우리의 내면 역시 실지로는 아이의 결핍된 상태, 무한한 관계의 가능성과 꿈을 담은 표정이 내재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직 표정이 체 발달하지 않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 생기는 묘한 초현실의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배우리의 그림 속에서 콧물을 흘리거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커다란 아이의 얼굴은 보는 이를 생생한 표정이 주는 동질감과 편안함에 쉽게 동화시키는 자연스러움과 독특함이 동시에 있다. 단순하고 은근한 색채와 눈동자의 생기 있는 묘사는 사람들에게 묘한 대조와 함께 미소를 유발하는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아이의 얼굴이 주는 가장 독특한 지점은 그 안에 아직은 무궁무진한 세계를 담을 현실 이상의 세계가 담겨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이의 눈동자에 담겨있는 무한히 확장하는 듯한 우주를 담은 듯한 색감과 움직임은 기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바라본다'는 것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무한한 대상과의 반응이나 변화가 숨겨져 있다. 대상의 표정을 결정하며 그 성질까지 변화시키는 화학적 작용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림과의 그러한 방식의 경험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변화의 경험을 해오고  있지 않았을까? 다시 한번 말해 보지만 표정들은 그가 바라본 것의 총체이자 그 반응의 표징이다. 그래서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그 대상의 상태와 인격적 관계 맺음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아이가 처음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본질적 변화를 깊숙이 그 본질 안에 심어 놓았듯이.) 그래서 표정을 담은 그림의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완성한다. 이것이 서로 바라본다는 것의 신비이다. 실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러한 바라봄의 기술을 발휘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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