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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Mar 31. 2017

소울은 재즈처럼

디딤발, 또는 행간에 관한 단상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것들을 잘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은 태양이 내려쬐는 건설현장에서 어설프게나마 소장님들과, 기술자들과 일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눈에 보이는 디자인이야 누구나 하고 싶은 즐거운 작업일 테지만 기둥의 하중을 계산하거나 배수로를 확보하고 집을 올바로 세우는 작업은 간단하지만은 않다. 특히 알고 보면 설계 도면은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활용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나면 좌절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즉흥적으로, 혹은 싸우거나 타협을 해가면서 어쨌든 집을 세우긴 한다. 우리가 집을 감성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미적인 공간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집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심상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Kevin Thrasher



어쨌거나 집이 완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무수한 설계와 갈등, 적용과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렴 풋이나마 알게 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디딤돌이나 토목이나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알게 될 뿐이다. 책을 읽을 때 행간의 의미를 헤아려야 한다는 말이나, 미술에서 여백의 미를 강조할 때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지닌 중요함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삶의 지침으로나 일상 속의 결정들과 관계 속에서는 잘 적용하지 않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효과와 필요는 사람을 모이게도 하고 흩어지게도 한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 이른바 '디딤발'이라고 칭 할 수도 있는 어떤 여백의 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Susan Worsham



그러한 디딤발은 분주함 가운데에 있다거나 만남 속에 있다거나 일이 시작된 이후에 온다든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음표의 사이사이나 (재즈의 싱코페이션, 즉 음이 제박에 오지 않고 이상한 엇박에 어긋난다는지) 문득 우울함의 끝이 바닥을 칠 때, 갑자기 주어진 길고 지루한 고요함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책을 읽다가 급히 머리가 복잡하고 나른해서 갑자기 빠져드는 낮잠처럼. 



                                        

Susan Worsham



이전에 어떤 망명자의 수기 속에서 오랫동안 받던 고문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랜 고문 끝, 마지막으로 숨이 멎기만을 바랄 때 이상하게 자신의 숨결을 붙들어 주던 어떤 힘이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러한 희미한 생명의 (아마 태곳적부터 인류의 DNA 속에 살아서 어떤 방식으로든 말을 걸어왔던) 속삭임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 고문 속 절망에서 자신은 틀림없이 죽어 갔으리라고 회고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특성에 관해 저술한 사례는 상당히 많다. 그 속에서 그러한 회생을 이루어 낸자들은 이미 그 사건 이전 그들 나름의 ‘상태’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Benoit Paillé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런 일을 간접적으로라도 체험해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언가 제대로 무언가를 하나도 이루지 못하거나 또는 명성과 성과에 도취되거나 하든지 간에 늘 한결같이 우리를 붙들어 주는 무언가는 반드시 있다. 그것이 무언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이다. 음표와 음표가 연결되기 이전,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 혹은 집이 지어지기 이전에 우리는 그 땅위에 서서 디딤발을 딛는다. 갈등도 생기고 도면을 변경하는 일도, 타협할 일도 생긴다. 그러나 빈 땅위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막막한 심정으로 서 있었던 그 빈 여백의 공간에 딛었던 디딤돌 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사건’도 시작되지 않았다. 내가 나로서 살아내야 하는 그 ‘순간’이 없다면, 혹은 그 순간을 직면하는 시점이 없다면, 나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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