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캐릭터 미술들
현대미술이 잃어버린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매혹’이라는 미덕이다. 물론 우리는 그 자체로 매혹적인 여러 미술품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루어지는 방식들, 즉 미술관에서 목록화되고 이름표가 붙여지며 덧붙여진 설명들의 정보 속에서 우리는 미술품 속에서 어떠한 위안이나 매혹의 순간과 연결된다기보다는 일종의 신경증에 가까운 분석이나 긴장들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이 지니고 있는 어떠한 권위의 속성을 잘 알고 있고 이것에 매우 익숙한 듯 처신하게 되지만 미술품이 왠지 우리의 심리 깊숙한 욕구나 소망들과 결부된 그러한 경험들과 무관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게 된다.
그러한 장소가 힘을 발휘할수록 나의 생활 속 일상들은 점점 왜소해지고 의미가 떠난 곳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과 매혹의 근본적인 충동들을 이해하고 그것과 관련성을 지닌 시각적 체험들이 우연치 않게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이름 모를 골목의 모퉁이라도 상관없이) 일어나게 된다면 멋진 경험이 되지 않을까?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소박한 욕망인 동화의 상상이나 축제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색채나 질감의 감흥과 연관되어 있다면 더욱 멋지고 흥분된 일이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동화적 표상과 상상들> 전시에 드러나는 (존경심이 담긴 용어로서의) 지역 아티스트들의 감각적인 면모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잊혀진 미술의 감흥인 ‘매혹’이라는 소박하지만 어쩌면 순결한 형태의 감흥들이 모여 빛을 발한다.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지우는 짐인 수직 수평적인 계열화나 네트워크는 동시에 우리에게 좀 더 원형적인 느낌의 인간적 표정을 다시금 재고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지역의 그림이나 예술을 다루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부여되는 관점은 오히려 좀 더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그림의 기초를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점에서 서구의 본격적인 개념과 설득의 기제가 제거된, 우리의 지역과 장소를 살아내는 작가들의 그것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건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접근을 우리는 동화적 화풍으로 이름을 붙여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용어에는 굉장히 대조적인 두 가지 이상의 가치평가가 잇따를 수 있다. (대중영합적인 취향과 예술의 본질에 관해, 긍정적인 보편성과 통속적인 표현에 관해, 혹은 순수한 창작의 범주와 대중영합적인 영역 파괴 등의 사변적이고 해묵은 미학적 쟁점들이 그런 것 들이다.) 그러나 긴장감이 풀어지게 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완고함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자.
김계현은 육각형의 작은 플라스틱 모듈을 제작하여 이것을 다양한 형태와 소재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레고나 블록 쌓기를 만들며 성장한 우리에게 이러한 작은 조각들을 쌓아 만든 조각적 형태감이 주는 감흥은 놀랍고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 조립된 조각 작품은 문화 사회적 비평적인 테마를 일견 띄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하나의 미술품으로서의 제스처에 가까운 것 같다. 오히려 어린 시절 동심의 시선으로 쌓아 올린 무한한 상상의 과정들이 던지는 스토리 자체가 우리에게 다양한 경이로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대담하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이 조립 작품들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상상력의 과정을 회복하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굳어진 (문자나 예술작품 등의) 관습적 표상들이 이색적인 관점으로 조립된다. 혹시 예술품을 보며 느끼는 흥미를 잃어버린 관람객들에게 이러한 동화적이고 직접적인 유쾌함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김범수의 작품에는 각기 다양한 색채와 형태들이 주는 장식적인 표정들이 눈길을 끈다. 어릴 적 뒤적이며 찢기도 하고 낙서를 했던 바로 그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람과 건물, 도로의 풍경은 지극히 인간적인 풍경들을 지니고 있다. 어릴 때 우리는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의인화하고 표정을 읽고 일종의 상상력의 산물로 그것을 대하지 않았던가. 김범수의 작품은 바로 그 잃어버린 사물이나 사람의 표정들을 회복시키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거나 관념적인 비관조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의 작품에는 솔직하고 생기 있는 미적 표정들이 보태어진다. 직관적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대했던 유년기의 상상력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장식적인 일종의 프리미티브적(원시적) 아트의 향취까지 스며있는 김범수의 작품을 무덤덤하게 지나치긴 쉽지 않을 듯하다. 그의 그림에 배인 색채의 아련한 향기는 오직 부산의 바다 휴양지에서 부는 바람에 의해서만 가능했으리라고 상상해 보는 것은 나만의 개인적 취향이라고 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김영미는 도자적인 작품 제작의 과정으로 독특한 본인의 개인적 심상이 담긴 조형물을 제작한다. 이것은 때로는 캐릭터로 때로는 사물이나 오브제, 때로는 쓰임세가 있는 다기로 제작된다. 김영미의 작업에는 일관되게 개인적인 심상을 표현하는 일러스트적 회화가 표면에 그려진다. 해서는 안될 듯한 물건에 마치 도발적인 낙서를 하는 격이다. 물론 낙서라기엔 그 그림에 들이는 수공적인 꼼꼼함은 상당한 시각적 쾌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꿈과 기억들, 개인적 심상이 담긴 조형적 캐릭터들은 그 자체로 유희적이고 낙천적인 감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엄숙함을 우선 필요로 하는 미술품이나 도자 제작의 기법과 이러한 유쾌함이 우리에게는 완고함을 이완시켜 주는 탁월한 위안이다. 무엇보다 사물을 보며 한때 가질 수 있었던 낙천적 시선을 회복시켜 준다는 점이야 마로 이 조형물들의 순진환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형, 오브제, 혹은 장식적 소품들을 ‘가지고 논다’라는 느낌의 작업은 요즘 정말로 흔치 않다. 역사적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의 인형이나 기성품을 재조립하며 색다른 의미를 던져주었던 미술적 흐름은 유명하다. 점점 더 이러한 오브제 작업들은 초기의 ‘플레이’라는 의미의 유희의 느낌은 사라졌지고 있다. 공공 조형물, 선언, 도시의 재해석 등의 사회적인 추세로 볼 때, 휴희라는 개념은 적어도 현대미술계에서 특별하게 환영받는 테마는 아닌 것 같다. 최규식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오브제의 색다르고 유희적인 결합은 커다란 감흥을 던져주고 있다. 의외의 사물과 의외의 플레이 속에 관람객들은 에로티시즘, 유아적 정체성, 현대의 사물에 대한 심리적 잔상이나 흔적들, 다양한 알레고리적 연상을 함께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분히 장식적이며 화려한 도발에 솔직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그의 작품에는 문명의 질서 정연한 의미로부터 일탈한 다양한 유년기적 자기애가 스며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만큼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더 매혹적이며, 잃어버린 놀이와의 감정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이어준다.
이영식의 작품은 확실히 도상적이며 캐릭터적 Iconic Approach 이다. 사실적으로 보이는 듯한 지인들의 인물상들은 반복적인 전개가 더해지면서 우리의 외형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 캐릭터라이징을 간파하고 있다. 사람과 대조되고 있는 배경들이 지닌 공간적 성격과 인물들은 점점 더 환경적으로 맥락적으로 내면화되고 있는 캐릭터의 성격 같은 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래서 더 차갑게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차가운 공간, 인체나 복장의 유연한 외곽선과 담백한 색체의 배열은 기묘하게 이질적인 듯 우리에게 익숙함을 준다. 익숙한 사실감을 통해 이영식은 우리에게 고착화되고 내면적으로 자리 잡은 어떠한 물상화된 캐릭터적 관점을 은근히 강조한다. 지극히 건조한 사실적 화풍 같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의 내면적 상태를 암시하는 일종의 은유로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양소연의 작품에 깃든 유머와 낙천적인 기운은 확실히 현대에 와서 우리가 확실히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이다. 아니 어쩌면 대중문화와 예술이 확실하게 분리되면서 예술이 더 이상 우리의 일상적인 감정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회화나 예술의 운명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갤러리에서 팸플릿을 집어 든 이 순간마저도 우리에겐 다양한 육체적(?) 감정이 싹트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양소연의 작품은 회화의 외양을 띄고 우리에게 짐짓 그런 척하는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우리의 숨겨놓은 듯한 유쾌한 감정을 불러낸다. 여행지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얼룩말들은 일견 일러스트적인 터치의 가벼운 풍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으로 충실하게 묘사한 결과물이다. 이것은 개인적 감정에 충실한 세대적인 감성의 적극적인 표현이지만 현대미술에 대한 만만치 않은 대응이기도 하다.
한충석의 작품에는 다양한 은유들이 등장한다. 정확하게 (아마도 약간은 심리적인) 이 표상들이 어떠한 현상들을 일컫는지는 조금만 들여다보거나 시간을 가지면 알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한충석의 작품들이 지닌 그림 그 자체의 매혹적인 표정들을 쉽사리 외면할 수가 없다. 이것들은 도표나 해설, 팸플릿의 서문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직접 오로지 그림 속에서만 나타나는 얼굴과 사물, 색감들의 결합은 오직 관람객들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이 그림의 원래의 사실들이 아닐까? 사물과 표정,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지닌 상상의 매혹은 비록 외부세계나 관계에 대한 코멘트나 스토리들이 담겨 있지만 나는 회화가 지닌 일차적인 만남들을 더 환기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회화가 지닌 잔잔한 이야기들은 귀를 기울여 볼만한 인간적인 결을 지니고 있다. 초연하지만 상상으로 풀어낸 그림의 이야기들이 실제로 얼마나 우리의 정서적 결을 바꾸어 놓았는 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동화적 발상이 지닌 천진난만함을 결코 가볍게 외면할 일은 아니다.
동화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에겐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또한 다양한 인물과의 의외성, 각색과 그림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에겐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축제였던 그 시절의 기억과 표정들도 역시 존재한다. 축제에는 통속적인 면이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사람들이 지닌 일반적인 열망이나 보편성 역시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깊은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촛불을 보며 마음이 동요하거나 추운 겨울날 불켜진 작은 카페의 아늑한 실내를 보며 무작정 들어가고픈 열망이 생기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두고 경박하다고 비난하지는 못한다. (오직 해야 할 일, 문젯거리만 생각하는 드물게 성실하지만 약간 서글픈 사람이 있기는 하다.)
축제의 시기에 선물과 낡은 엽서에 새겨진 그림들은 기억과 함께 우리를 특별히 사심 없이 받았던 시선과 관심의 시기로 데려다준다. 관심은 정말 진실한 시선의 동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술이 이러한 동화적 상상의 시기, 제 각각 바라보던 외부 세계의 표정들을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현대는 더욱 더 매일이 축제인 소비, 심리와 환경이 교차하는 삶을 살게 해 준다. 그만큼 드라마틱하고 캐릭터적으로 생생하게 우리는 일상을 살게 된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동화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삶의 표정들을 담아내는 작품들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표정을 읽으려는 순진하지만 진정어린 시선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상상 속 동화적 순간을 회복하려는 작가들의 축제적인 시선을 통해 바로 오늘 - 지금을 사는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 순간들의 그 시선들을 떠올리게 된다. 다름 아닌 관심 속에 담겨 오고 간 바로 그 ‘매혹’의 시선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