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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Mar 19. 2018

피아노와 그림들

Tord Gustavsen Ensemble 의 재즈 

부산이 비록 별다른 운치가 있는 거리 풍경을 선사하는 곳은 아니지만, 비가 올 때면 도시는 유달리 눈에 띄는 색채감을 지니게 된다. 고가도로를 받치는 기둥, 그 아래의 작은 점포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아우성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요구를 드러내고 있는 학원이나 각종 업소들의 간판들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우리네 삶이 지니는 치열한 표면들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비가 뿌려질 때쯤에 우리는 한 번쯤 이 거리나 공간이 어쩌면 실지로는 아름다운 어떤 성격 위에 올라선 희망의 숨결일 수도 있겠다는 조금은 낙관적인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러한 감흥과 더불어 신기하게도 최근의 젊은 작가들은 도시의 표면이나 질감, 혹은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의 작업들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제는 곧 소멸해 갈 문명의 작은 흔적들을 이곳저곳을 거닐며 시선으로 담아낸 미술작품들은 독일의 재즈 레이블에서 발매되는 ECM의 사운드와 곧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소멸해 가는 것들, 곧 사라질 흔적들의 질감들에게는 과밀한 도시 공간들이 주는 소음들과 달리 우리에게 시선의 자각을 일깨우는 미니멀한 재즈가 제법 잘 어울린다. 


김민정 작가의 그림은 사진, 꿈, 기억의 경계 그 어디쯤에서 텅빈 도시의 잔상을 그려낸다. 작가는 형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유된 의식 속의 그림들을 일깨운다. 


행군에 지친 우리는 그림에 눈을 돌리며 저 멀리 창밖의 풍경에 시선이 머무는 것을 느낀다. 이 풍경이 펼쳐진 공간에는 전혀 다르게 흐르는 시간이 있다. 우리에게 진정 절실한 향수가 있다면 바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일 것이다. 그림의 미덕은 어떤 개발지에서 끓어 오르는 구호들이나, 뉴스의 다양한 사회적 어젠다들, 계몽적인 훈계들을 비켜나서 적어도 한 번쯤은 그러한 속도 속에 내가 온전히 존재했다는 실존의 시간들을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림들은 종종 우리에게 사물들과 내가 교환되는 시선 속에서 관계들을 맺고 살아 낸 온전한 지혜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재즈의 피아노 선율이 그려내는 단선적인 선율들이 신경회로처럼 흰 여백을 퍼져나가면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소리도 온전한 그림이 된다. 



물속에 잠긴 도시를 그리는 정문식 작가의 풍경. 이 그림들은 도시 속 아우성치듯 울리는 소리들로 부터 우리를 멀리 떼어낸다. 


피아니스트인 토드 구스타브센 tord gustavsen 은 유럽의 재즈 레이블 ECM 의 젊은 신예이다. 트리오 앨범을 내놓은 후 2012년 이후에는 4인조 쿼텟, 또 앙상블의 편성으로 새로운 앨범을 내놓았다. ECM 레이블은 묵직하고도 진중한 클래식의 분위기가 나는 재즈 스타일의 음악을 선 보이고 있지만, 어쩌면 아름답고 깊이 있는 그림과 사진의 디스크 재킷으로 더욱 대중들에게 유명할지도 모르겠다. (Pat Metheny, Kieth Jarrete, Chick Corea, Gary Burton 등이 솔리스트로서 이곳에서 명성을 쌓아왔다.) 토드 구스타브센의 음악에 많은 설명을 덧붙인다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단지 ECM 레이블에 걸맞는 인상적인 포토그라피의 재킷과 완결성 있고 미니멀 아트를 연상시키는 악기의 그 자체의 소리와 재즈적 터치에 귀를 귀울 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흔히 예술이나 재즈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람소리나 파도의 운율과 구름이나 석양이 수많은 색채들과 뒤섞이는 복잡한 현상들을 어렵다고 느끼 지는 않는다. 비록 예술품이 인간의 창조물이긴 해도, 그것에 어떠한 자연스러운 리듬이나 요소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이 깃들어 있다면, 이를 어렵다거나 복잡한 의미의 강박증으로 해석하거나 분석해 낼 필요는 없다. 다만 토드 구스타브센의 피아노 소리와 악기들의 뒤섞임에 가만히 마음의 상태를 덧입혀 보는 것이 조금 더 적합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내리는 시간. 조명없이 벽면에 기대선 작품들은 사실상 그림의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진다. 우리의 기억에서 풍경은 우연히 잘못찍힌 사진에 가깝다. 이선옥작가


왕덕경 작가가 그리는 빈집 시리즈. 우리가 경험한 것은 공간일까? 생명의 핏줄이 아로새겨진 시선의 흔적들일까? 


우리는 '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음악이나 그림을 조금은 신경증적인 태도로 논평하는 것을 즐겨해 왔다. 이름 값하는 모더니즘의 거장들과는 다르게 도시의 젊은 작가들의 그림에서 나는 그들의 공간에 대한 질감 속에 잔잔하지만 언젠가 느꼈던 확실한 경험적인 자각을 지혜롭게 표현해 내고 있다고 느낀다. 굳이 설명을 보태자면, 이러한 그림들은 '문명'이라는 삶의 흔적들 - 바로 그것이 새겨지는 질감들, 혹은 생명들이 공유하는 기억의 한 형태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조금은 활기를 잃은 모던시대의 산물인 대학이나 미술제도의 짜여진 절차가 아니라, 진정 도시의 공간에서 얻어내었던 우연한 자각들은 우리에게 생기 있는 표정의 멜로디로 다가온다. 구도심의 골목을 돌아 우연히 방문한 문화공간 한편에서 그림을 떼내고 붙이며 부지런히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또한 잔잔하게 관조적으로 흘러가는 구스타브의 재즈를 듣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의 피아노 선율에는 지난난 삶의 기억들이 덧칠된 우리의 공간, 집들, 우연히 잘못찍힌 기억속의 거리들이 떠오른다. 


이러한 음악들은 단지 음악 그 자체뿐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 소리, 삶의 터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상태들을 그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마음속에 부는 바람이나 공간 또는 우연히 마주친 질감에 시선을 둘 수 있는 여유가 없다면 이러한 소리들은 더 이상 내게 울림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강팍한 도시의 거리이지만 이러한 소리들로 조금은 우리가 색채감 있는 어떤 곳으로 변화한 대상으로 바라볼 여지를 가지는 것이다. 사실 '의미의 강박'에서 조금만 벗어난다면, 어려운 예술도 어려운 현상은 별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속도 속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관조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어렵고 복잡한 우리의 심상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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