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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May 05. 2018

'도시'라는 기억

게토를 위하여 

도시, 공간, 네트워크 등 비선형적 구성*의 공공 프로젝트로 다루는 기획 전시들을 통해, 미디어나 미술 표현영역들을 점검해 보는 시도들이 적지 않다. 나 역시 한 명의 작가로서 수년 동안 줄기차게 도시적인 표면과 구조물 등을 촬영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도시공학적, 사회학적 지향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그것은 미술문화적 형식과 개념과도 무관한지도 모르겠다. (그 개념을 우리 시대에는 각자의 방식대로 말한다.) 그러한 작업들에 나타나는 도시의 외시적인 이미지들은 사회적 물리적 공간으로써 도시라기보다는, 인간의 또 하나의 무의식인 '미디어적 무의식'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미디어의 재현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심리적 환경 조건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도시공간은 더 이상 계급적, 물리적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무의식적 겹 layer으로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도시 이미지와 구조물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행위부터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충동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은유적인 표현인) 게토 ghetto로 인식하려는 경향으로 설명하고 싶다. 


미디어나 다양한 재현들을 통해 드러나는 '도시라는 기억'을 덧칠하는 새로운 매체적 인상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시 프로젝트의 전개들이 디지털 매체의 특징적 요소인 분리적 비연속적 공간적 도약이 드러나는, 비선형적 전개들을 지니게 되는 것이 우연한 것은 아니다. (*2차원과 3차원, 도시공간과 사이버 공간의 비연속적인 도약, 또는 인과적인 시간성과 개연성을 벗어난 상이한 스타일의 동시적인 발생을 비선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리를 채집하여 지역의 특수한 재료들이 소리와 함께 재탄생된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고유한 기억의 재생회로이다. sound installation 정만영 2015 


도시 공간과 공공적인 프로젝트와 연계된 전시나 기획을 본다는 것이 특히나 요즈음 와서 어렵지 않은 일이 된 데에는 (물론 사회적, 미학적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보다 심리학적 연결고리들이 있을 수 있다. 요즈음은 도처에 도시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다양한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라피티가 그렇고 거대한 광고판이 그렇지만, 심지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고 건물을 연결하는 고가도로와 지하철 조차 도시의 미적 외형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포커스가 맞춰지는 카메라의 렌즈는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소셜미디어에 올려지며 서로를 더욱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도시공간은 더 이상 계급적, 물리적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무의식적 겹 layer으로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다. 송도, 감천문화마을, 센텀시티에 만들어진 수많은 상상력이 동원된 창의적인 건물이나 조형물들은, 이러한 도시 이미지의 충동이 우리의 의식 위에 가상의 도시공간을 새롭게 건설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나는 도시 이미지와 구조물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행위부터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충동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일종의 은유적인 표현인) 게토 ghetto로 인식하려는 경향으로 설명하고 싶다. 







2차 대전 무렵 유럽에서 유대인을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지역을 칭하는 게토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을 거쳐 현대의 모든 거리에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 안에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연결하기 위한 도시의 건축물, 고가도로, 교통망과 통신 네트워크들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묶어내기보다는 종종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경험하고 소통해 가는 삶의 가장 일차원적인 '장소'가 어쩌면 다양한 양태와 조건을 영역화하고 분리시키는 공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도시에서의 문화적 심리적 분열성을 경험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캐나다 그랜빌 섬 프로젝트, 오스 지오메스 Os Gêmeos  2014



이렇게 도시의 온갖 행위, 사물, 공간의 구조적 상태로부터 사람들의 시각 경험이 출발하게 된다. 적은 규모의 지역공간에서 조차 시작과 끝이 유기적으로 동일하게 일관되게 흘러가지 않는다. 골목에서 골목, 또 다른 공간에서 공간으로 선형적으로 이동하는 경험은 드물게 네트워크의 #(해쉬태그)로만 연결된다. 파편화된 일종의 미디어 '게토'에서 사람들은 단절된 삶의 연속성을 기대한다. 낙서는 이러한 구조화된 인식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반달리즘 vandalism이라는 단어는 도시인들의 충동을 섣부르게 가치 판단해 버린 용어일 뿐이다. 도시 공간을 사는 도시민들의 빈 공간과 게토적 독립을 이러한 힙합 그라피티가 일탈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토는 단순한 지리적 분리에 의해 각 영역이 독립되어 있으며 그 나름의 공동체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유대는 주류의 지배적 담론이나 문화 형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일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작품들은 공간에 대한 매타비평이 되고 있다. Fregments-Busan, Bruno Requillart 2017



도시의 게토화는 단순한 사회 경제와 같은 근대적인 틀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도시 건축물들의 공간적 체계화가 이루어질수록 오히려 사람들은 이러한 게토적인 아름다움에 눈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어쩌면 최근 도시나 공간을 해석하는 프로젝트가 유행하는 본질적 이유이다. 도시를 정비하기 위한 개발과 건축이 오히려 저개발과 혼란스러운 게토적 문화에 대한 자각으로 발전한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시내버스 101번의 출발지와 그 반환지점이 전혀 다른 계층과 차원을 거치듯이 우리의 도시는 이러한 각 게토들의 다층적이고 심미적인 무의식을 어루만지며 그 영역화를 빠르게 진행해 오고 있다. 단지 이 '게토'는 지리적 계급적 영역이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적인 자발성으로서의 미적 심리적 지각의 의미로서 메타포이다. 







거리에는 푸부 Fubu나이키, 로카웨어 션 죤 등의 힙합 브랜드가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는 풍조가 있다. 물론 이것은 진보나 혁명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브랜드화된 정체성의 내면에는 미적 경험과 자신의 태도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소수 집단 문화'의 특징이 녹아 있다. 예컨대 흑인들의 거주지역 할렘에는 여타 지역과는 구분되는 뚜렷한 라이프 스타일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소수집단 문화의 외시적인 주술 혹은 강인함이라는 공동체적 삶을 대변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흑인들의 정서상태를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둔갑시키는 묘한 연결고리들이 존재한다. 어떻게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가장 주변적인 것들이 가장 상업적인 것으로 둔갑했을까? 이것을 단지 상업화의 자본력으로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주어진 조건들을 의식적으로 비판하거나 수용하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자본주의적 아이템을 탐미적인 주술로 재구성한다. 아마도 인간의 가장 보편적 욕구에 담긴 차별과 저항, 공동체에 대한 다소 원시적인 욕구가 힙합 음악이나 게토 문화의 대단한 성공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미디어는 이러한 것들과 관련해서 도시의 링크 망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피부로서의 도시공간을 다시금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상시적으로 빨리 연결되는 시대일수록, 우리 내면의 게토와 공간은 나름의 독립과 미적 순수성을 갈망할 것이다. 미디어는 이러한 도시 공간을 새로운 미적 심리적 지점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역과 삶의 터전을 색다른 시점으로 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재개발되는 마을, 도시 안에 있지만 가장 낙후된 변방 마을, 오히려 그런 곳에서 우리는 생생한 게토적 아름다움과 만날 수 있다. 포탈의 인터넷이나 거대 자본의 호화빌딩들에서 볼 수 없는 삶의 양태로서의 자율성 말이다.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그림자와 흔적에서 보이는 그 생생한 체험을 우리는 도시의 피부와 그림자를 통해서 본다. 도시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주변적인 공간을 별다른 정치, 사회적인 편견 없이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에게도 놀라운 일이다. 우리에겐 도시나 공간의 유동적인 피부를 의식하고 그것을 상상력의 일부로 보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특히 특정한 공간, 골목이나 도시의 영역을 자신의 유일한 게토로 규정하고 그러한 동일시와 욕망을 그려주는 매체를 찾아내고 생산하고 미적으로 그려내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Fregments-Busan, Bruno Requillart 2017 


우리의 상상 안에서 누구나가 자신의 게토를 그려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생생하게 또 다른 연결점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곧바로 그곳으로 링크될 수 있다. 매체는 이러한 것들과 관련해서 도시의 링크 망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피부로서의 도시공간을 다시금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상시적으로 빨리 연결되는 시대일수록, 우리 내면의 게토와 공간은 나름의 독립과 미적 순수성을 갈망할 것이다. 미디어는 이러한 도시 공간을 새로운 미적 심리적 지점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도시'라는 새로운 기억의 저장소는 우리에겐 디지털과 공존하는 새롭게 재탄생하는 재현 매체가 될 수 있다. 


재생공간 F1963(부산)을 위한 미디어 사운드 인스탈레이션 - 지질학적 풍경, 부산 김현명 2017


게토라는 분리의 벽은 배타가 아니라, 도시의 기능적인 영역의 구분을 심리적 지각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하나의 태도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이름 없이 구분 지어진 어떤 공간들을 미디어의 무의식 속에 하나의 겹으로 발라냄으로써, 그곳을 색다른 게토로 재구성되는 것을 목격하는 중이다. 나는 거대한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이러한 게토를 굳이 새롭게 건설하기보다 단지 매체를 통해 나타났다 사라지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 공간들이 가진 지역성과 주변부적인 특성을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권유한다. 도시에 계속해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콘크리트 덩어리와 화학물질을 쏟아내기보다 우리의 심미안을 간단하게 그리고 고유한 것으로 바꾸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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