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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May 16. 2018

우리가 잃어버린 기술

어떤 상실에 관한 보고서

비 오는 일요일 저녁 네 명의 아저씨가 만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또한 우주가 폭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래된 친구들이 의례히 그렇듯이 우리에겐 거북한 서론이나 탁월한 안목의 결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중 한 명이 운영하는 카페로 가서 이제껏 그래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대화의 한 자락에 그저 시간을 보태는 것뿐이었다. 이야기는 최근 본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로부터, 지인들의 이해되지 않은 근황들, 창작과 생활, 예술론, 급기야 젠더이슈와 성적 취향의 문제로 까지 나아갔다. 우리는 내밀한 기사단이라도 되는 양 시작과 끝도 없는 조각들을 이어 붙여 어쨌든 충분히 취향을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헤어지고 나서 그날 이야기의 조각들을 한번 꿰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수다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대체로 한두 가지 줄기로 정리된다. 첫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양에 관한 것이었다. 녹록하지 않은 현실세계 속에 던져진 각종 현안과 인간들의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또 그만큼 쉽게 분류된다. 또 하나는 문화나 담론으로 제시되는 세계관이다. 이것은 관점이나 궁극적인 방향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쉽지 않은 데에는 취향과 가치, 방법론이 뒤섞여 실지로 의미 있는 소통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래도 요즈음에 이러한 가치문제를 터놓는 것만 해도 커다란 안심과 동료의식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 일 수 있다.



복잡 다난한 이슈 속에서 우리의 문화 취향과 감각들의 상호 교차되고 폭발하는 상념들 - 이것이 바로 이날 네 아저씨의 수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화에는 충분히 이야기되었지만, 정말 결론을 내기에 쉽지 않은 하나의 줄기가 존재할 것이라고 느꼈다. 존재하였지만 쉽사리 정립되지 않아서 더 이상 깊이 나아가지 못했던 한 가지 본질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 대화의 숨겨져 있었지만 가장 커다란 줄기가 있다면 -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상실'에 관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사물 속에서 관련을 맺고 함께 존재할 수 있었던 기술, 무엇인가 쓰임새가 있거나 유일한 하나의 물건을 만들어 내던 바로 그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친구가 모두 관련한 일을 하거나 관심이 많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사실상 우리의 대화가 무엇이든지 그 결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우리가 주고받았던 것은 바로 그 기술과 어떠한 상실에 관한 서로 간의 위로였다.  




매일매일 스스로를 주장하지만 그렇게 생산되는 숫자만큼이나 또한 존재가 불투명하기도 하다. 용도와 쓰임새, 물질의 내재적인 가치나 인간적인 모습은 그럭저럭 시장의 교환 안에서 겨우 가치를 획득할 뿐이다. 요즈음 물건은 존재하지 않은 인간적 충족감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이 사물과 사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비실제적인 환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요즘 기술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상호 생산적으로 네트워크 되어있는 유무형의 '기술체계' 모두가 기술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어떠한 재료에 용도를 부여하고 물건을 만들어 이를 형상적으로 해방시키는 방법이 바로 기술이었다. 흔한 예술이나 문화의 담론에서 곧잘 빠지는 부분이 또한 이 기술이다.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뒤 이러한 사물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생산된 물건들은 대체로 유일한 독자성을 지닌 고유한 사물로 변한다. 이러한 사물들은 유희적으로 우리와 애착을 맺기도 하고 또한 적절한 쓰임새로 우리 일상의 어느 공간을 차지하기도 한다. 어쩌면 자연 속에서 다양한 물질과 재료, 형태들과 함께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인간적 실존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애착하는 장난감을 지니고 그 사물과 세상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흡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현대가 추구하는 문화의 감각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을 것이다.



요즈음 물건과 기술들은 교환가치라는 공간 속에서 물질세계와 전혀 다르게 작동된다. 그 사물들은 아찔할 정도로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고 나타나지만, 아무런 실존적인 관련성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매일매일 스스로를 주장하지만 그렇게 생산되는 숫자만큼이나 또한 존재가 불투명하기도 하다. 용도와 쓰임새, 물질의 내재적인 가치나 인간적인 모습은 그럭저럭 시장의 교환 안에서 겨우 가치를 획득할 뿐이다. 요즈음 물건들은 존재하지 않은 인간적 충족감에 대한 애착이 사물과 사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비실제적인 환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물건들이 나와 세계를 안전하게 존재하게 하는 진정한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의 대화에서 그래도 하나의 줄기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한 상실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에 반해서 이전의 물건들은 보다 육체적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 기술들은 재료, 자연, 선택이라는 단계적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실존적인 영감이나 육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측면의 (그러니까 모더니즘의 주체적 인간상과는 대비되는) 인간의 순종적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과정에는 물질과 인간의 원초적인 재능과의 대결이 존재한다. 오랜 시간 속에 축척되어 유산으로 내려오는 방법들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들은 단지 손재주가 아닌 커다란 교훈의 결실로 서서히 나타난다. 물질의 본래적 특성과 씨름하여 오랫동안 한 단계씩 몰입하지 않으면 그 물질은 다음 단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수많은 단계들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숙련이나 훈련, 또한 문득 주어지는 손에 주어지는 감각들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또 그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주체적이라기보다는 물질과 외부의 현상에 겸허한 또 다른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 과정들은 한두 사람의 몫이 아니다. 공동체의 팀워크를 필요로 하며 또한 그 과정에 알맞은 환경과 과정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물질과 인간의 단계적 재구성에는 제각각의 역할과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마 기술 자체가 교훈이자 인간적 관계들의 역학들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존이라는 열매를 맺히게 된다. 우리가 물질과 자연, 선택하는 자유와 각 단계들을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쓰임새와는 다르게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실체적 자존을 획득하는 일,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세계를 재구성하고 올바른 관련성을 획득할 때 우리의 외부 환경과 물질과의 자연스러운 공존, 즉 충족된 자존을 지닌다는 것이 올바른 기술의 결론이 아닐까? 이것이 우리가 현대에 와서 '잃어버린 기술'의 한 측면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술들은 우리가 그러한 진중하고 일상적 삶 속에 존재하는 탁월성을 알아보는 겸허함의 과정이나 지혜이다. 오로지 육체와 오랜 시간 속의 순례길에서 겸손하게 주어지는 숙련된 탁월함에 의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가 지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이제 영역 간 취향의 차이들 속에 하나의 빠트린 키워드를 찾아보자. 그건 바로 그러한 종류의 기술 속에 나타나는 '탁월함'이다. 탁월함은 우리가 추구한다기보다는 어쩌면, 유산이나 자연 속에서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술들은 우리가 그러한 진중하고 일상적 삶 속에 존재하는 탁월성을 알아보는 겸허함의 과정이나 지혜이기도 하다. 오로지 육체와 오랜 시간 속의 매마른 순례길에서, 문득 주어지는 숙련된 탁월함에 의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가 지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어떤 예술이나 문화의 감각적인 영역을 지배하는 담론들 안에서만 그 탁월성이 보장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날 우리가 나누었던 개개인의 취향과 차이점, 아니면 오래된 것들과 새것들, 혹은 네명의 주체적 의지를 대변하던 영역들 간의 대립항이 무언가 결론 없는 상실 속을 맴돌았던 근본을 직시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날 뿌리는 비를 맞으며 네 명의 아저씨는 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대화는 온 우주와 인간적인 욕망과 곧 사라질 문화의 감각적인 이슈들을 오갔고 우리의 대화 역시 곧 내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상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또한 넘겨지는 낡은 책의 한 페이지처럼 그다지 명쾌하게 존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지혜나 상실에 관해 올바른 질문을 했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가장 본질의 중심에는 '잃어버린 기술'에 관한 정립되지 않았지만, 해볼만한 고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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