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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ug 17. 2018

디지털 시대, 음악과 함께 사는 법

우리가 들어야 할 이유 

음악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청중이다. 막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가 놓인 무대를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거나, 잘 닦은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플레이 버튼을 누른 뒤 퍼지는 음악소리에 시간과 공간이 새로워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마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청중의 현존이 없다면 당연히 음악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은 이렇듯 우리가 시간 속에 온전하게 존재하며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각성시켜 주는 훌륭한 삶의 거울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아우성들과 긴급한 필요들에 대해 응답하면서, 살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자신의 부름과 감각의 온전한 요청에 대해 충분히 듣지 않기에 그렇다.


점점 더 우리는 시시각각 우리에게 알림을 전달하는 문자와 비트, 다량의 정보 속에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저런 아우성들과 긴급한 필요들에 대해 응답하면서, 살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자신의 부름과 감각의 온전한 요청에 대해 충분히 듣지 않기에 그렇다. ‘듣는다’는 것은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능력까지 필요로 한다. 우리는 빠르게 대처하는 다양하고 재치 있는 수완에 비해, 한 가지에 집중하며 온전하게 대상과 공존하는 능력이 점점 결여되어 간다. 이러한 시기에 나는, 우리가 뒤처지지 않기 위한 경쟁에서 빠져나와 시간과 대화하는 법을 알려주었던 훌륭한 음악들을 한 번쯤 짚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Bill Evans 빌 에반스는 재즈를 진정한 감상음악으로,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고독한 내면을 담은 20세기의 클래식으로 격상시킨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계절이 가득 차고 깊어지는 시기에 빌 에반스 Bill Evans (1929~1980)의 재즈 피아노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빌 에반스는 50년대까지 흑인들을 중심으로 뜨겁게 발전해 오던 재즈 흐름에 지성과 차가움, 클래식한 취향을 불어넣은 재즈 발전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뮤지션이다. 뿔테 안경을 끼고 담배를 피워 문 그의 연주 장면은 마치 그 당시 까뮈나 샤르트르처럼 인기 있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빌 에반스는 정교하고 부드러운 터치를 통해 재즈를 실존적(?)으로 의미 있는 음악으로 업그레이드했고, 고독의 한가운데에 있는 현대인들의 감성을 우아하게 잘 살려내고 있다. 그의 피아노 독주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내면적 고독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어루만져 주는 대화의 귀재였던 빌 에반스를 만날 수 있다.  



화질이 좋지 않은 것이 대수랴. 나머지의 모자람이야말로 우리 상상력의 몫이다.  안토니오와 엘리스의 사랑스러운 듀엣 '물의 행진'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두세 살 짜리 아이와 단어로서의 아무런 기능도 의미도 없고 발성도 없는 소리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이것으로부터 음악이 발생했는지도 모른다. 대화의 중요한 지점이 이러한 놀이에 숨어있다. 보사노바의 창시자이며 작곡가, 싱어였던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Antonio Carlos Jobim(1927~1994)과 브라질 여성 보컬인 엘리스 레지나 elis regina의 '물의 행진 (1974)‘이라는 곡은 음악이 지닌 다정하고 경쾌한 대화의 모습을 떠올려준다. 원래 건축을 전공한 조빔은 가장 쉬운 멜로디와 아름답고 화려한 재즈의 화성을 브라질 음악 안에 녹여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곡은 쉬운 듯 대화하듯 이어지는 두 사람의 멜로디가 자연스레 낙천적인 리듬과 함께 한곡 안에 녹아있다. 노래는 끝으로 가면서 점점 더 즐겁고 장난스러운 흥얼거림으로 즉흥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곡들의 순진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구성과 하모니는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장난치듯 대화하는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보사노바는 재즈의 한 흐름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말할 때의 읊조림과 가장 비슷한 느낌의 음악 장르로서 (상대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기분 좋게 느끼게 되는) 대화의 유쾌한 속성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이 앨범에서 노래는 제 각각 떨어진 여러 곡이면서도 또 한곡처럼 들린다. 인간의 삶과 사회와 예술은 마찬가지로 하나의 앨범에 담긴 여러 곡의 노래와 같다.



사실 세상은 유쾌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 우울의 바다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서야 약간 비치는 햇살을 통해 작은 기쁨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마빈 게이 Marvin Gaye(1939~1984)는 그다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1971년 그는 우연히 거리에서 흑인들이 경찰들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동생으로부터 월남전에서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 이후 그의 음악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마빈 게이는 당대 최고의 소울 보컬리스트로서 단순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을 중단하고 역사적인 명반 What's going on (Motown,1971)을 통해 미국과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사건에 관해 전달하였다.





이 음반은 흑인음악이 단순한 발라드가 아니라 재즈, 가스펠, 토속적인 영가와 관현악을 결합한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이 시기의 흑인음악이 단순한 인종적인 통속 음악의 한계를 넘어서 현재 전 세계적인 보편적 정서를 담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음악이 진실과 현실의 보편적 사실을 전달할 때, 음악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높은 성취와 전달력을 지닐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 주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의 불행한 관계를 이어오다 돌발적인 사고로 사망한 마빈 게이의 삶은 (음악과 예술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두움과 그것을 극복하고 구원을 소망하는 과정에서의 희열과 같은 인간의 양면적인 측면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채화를 그릴 때 우리는 비슷한 정물을 테이블 위에 물건들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그린다. 기억 속에서 우리도 엇비슷한 무대 위에서 조금씩 모양을 바꾸는 그다지 다르지 않는 삶을 산다


지역이나 장소라는 것을 넘어서는 어떠한 솔직한 예술도 문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앤디 워홀이 살았던 뉴욕의 첼시(Chelsea)라는 동네에 모인 작가들의 분위기가 ‘팝아트’라는 세계적인 유행을 만들어 내었듯이 말이다. 사실 훌륭한 작품들은 미술 화보집이나 역사책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때 부산의 미술 화풍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을 때가 있었다. 국제적인 트렌디와 상관없이(?) 부산 작가들의 화풍과 필력은 녹록지 않은 내공을 보여준다. 그중 오랫동안 전시활동을 쉬다가 최근에 다시 활동을 재개한 장수임의 그림은 특히 우리 지역 미술작품들의 한결같은 솔직함과 끈기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는 우리에게 친근한 다양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그림을 통해 첨예한 이론이나 엄숙함의 통제가 아니라, 자유롭게 뛰놀며 어린아이와 사물들의 친근한 장난스러움이 스며있는 무대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그림은 외부세계와의 끊임없는 수다를 잠시 차단시키고 내적인 대화를 위해 내 안에 쳐진 커튼을 활짝 열어보기를 권한다. 우리가 손을 뻗으면 존재하는 귀한 속삼임은 내가 새롭게 변화면 더욱 잘 들리게 된다. 한때 내방에 놓여졌던 친밀한 물건들과 같이, 우리 주변의 소중한 작품들도 비로소 새롭게 보이게 된다. 



나에게 울림이라는 파동이 퍼지는 공간, 즉 진정한 내적인 무대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듣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없으면 그림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순위는 먼저 나의 내적인 요청과 소리를 들을만한 청중이 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로 와서 우리는 실로 다양한 예술과 생각들을 다양한 경로로 한꺼번에 접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예술이 부족하거나 작품의 빈곤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너무 많은 문화적 활동들이나 생각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겐 오히려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울림이라는 파동이 퍼지는 공간, 즉 진정한 내적인 무대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듣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없으면 그림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뒤처지지 않을 강박증 속에서는 선한 의도나 가치도 쉽사리 폭력이 될 수 있다. 


쏜살같이 흐르는 속도와 비트의 연결 속에서도 잠시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볼만한 여유를 내어 보는 것이 어떨까?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순위는 먼저 나의 내적인 요청과 소리를 들을만한 청중이 되는 것이다. 진정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이해하게 된다. 그것들이야 말로, 나의 나머지 삶을 살아내고 또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숨결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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