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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ug 24. 2018

주목받지 못한 삶

하늘에서 바라본 도시풍경에 담긴 놀라운 그림

누구나가 주목받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주목받지 못한 삶'이 어떤 것인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성적이 나쁜 아이들이 쉽게 옷차림이나 그네들만의 시끄러운 속어를 발달시킨다든지, 무력감이 들 때 우리는 일단 시선으로부터 달아난다든지 하는 이유도 근원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두 이러한 이유와 연관이 있다. 요즈음 특히 장소나 공간들도 누군가에게 주목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런 곳에 의례히 사람들이 모여들고 밀도가 높아진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는 도시적 삶에서 누구나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살게 된다. 그러한 종류의 욕망은 공간의 밀도와 시선의 섬세한 관찰을 견뎌내야 하는 면역력을 높여야 할 수밖에 없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겠지만, 공간의 밀도와 함께 그런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의 성취 역시 말할 수 없을 정도 일 것이다. 그러한 행위의 정점에는 예술이 위치한다. 예술은 최고의 섬세함과 자연스러움(혹은 거북함)을 지니고 있지만, 또한 권위의 정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지배하고 있다. 어쩌면 예술작품도 주목받기 위해, 유명해 지기 위해 더더욱 신비로운 자태와 명민한 언어를 함께 지니고 가야 할 운명에 처해있다. 





예수가 보낸 광야에서의 40일은 어쩌면 그러한 주목으로부터 소외되는 기나긴 여정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탄이 광야에서 보냈던 유혹은 주로 '보암직한' 시각적인 것들이다. 나는 정말 우연하게도 부산의 주변부 공간을 밀도 있게 관찰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부산의 지질학 공원을 관찰하고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나는 퍼뜩 '광야'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중동의 뜨거운 사막이나 스페인의 순례길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나는 광야라는 키워드가 무척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홍보담당 공무원에게는 안타깝게도) 관광지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서 혹은 문화의 발생지로서 부산은 점점 더 주변부가 되어 가는 중이다. 왜냐하면 점점 더 문화나 예술은 터질듯한 밀도와 시선 속에서 더더욱 매혹적인 관심의 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질학에 무지한 내가 부산의 지질공원에 관한 짧은 영상을 제작하며 돌아보았던 부산의 외곽지역은 인간적 욕망의 지점에서 - 광야로 지칭하기에는 적합한 심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부산의 지질학적 풍경에는 아찔할 정도의 시간적인 개념이 보태어진다. 수만 년, 혹은 수천만 년 동안의 궤적이 쌓아 올린 조형적 패턴들이 그것이다. 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시점으로부터 조금은 더 자유로와 지는 경험을 했다. 해변가인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금정산을 오르면서 흔하게 내가 지나쳤던 고정불변의 풍경과 경치들이 어쩌면 수만 년 전에 어떠한 종류의 지질학적 움직임으로부터 형성되는 중인 '우연한' 조형적 무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것은 우연한 것에 관한 다소 실존적 질문으로 변해갔다.  





지질공원에 이어서 나는 부산의 거의 모든 공단의 풍경을 영상에 담아내었다. 지질공원을 촬영하면서 돌아본 지역 부근에는 우연히도 즐비한 공단들이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재미있었다. 지질공원 영상물을 촬영한 뒤, 자연스레 꼭 이 풍경들을 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시점이 변하자 고정불변의 것도 없었고 우연한 것도 없어졌다. 정적인 것들은 본질이나 어떠한 시점 안에서는 무한히 움직이는 미적인 역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부산의 지질학적 풍경 안에서는 광야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삶과 같이 서서히 움직이지만 일관된 (심미적 이기라 기보단) 존재론적 자연스러움만이 부각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공간 안에서는 밀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규칙적으로 다양한 조형적 무늬만이 이질적이지만 서로 조화롭게 시간의 결을 쌓아 두고 있었다. 풍경들은 시시각각 다이내믹한 그림들을 펼쳐 보였지만, 다만 그것은 오롯이 내가 걷기를 작정하고 주변부 공간을 기꺼이 시선으로 포용하고 받아들일 때 주어지는 것들이었다.  





한때 부산의 발전을 상징했었던 공단들은 자연 풍경과는 다르게 남성적이고 복잡한 신경회로처럼 속살과 근육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을 이 조형물들은 지질학적 풍경과는 대조적인 패턴들을 보여준다. 분명 대비되지만 나는 그래도 이것들 조차 커다란 지질학적 풍경의 일부로, 부산의 소멸되어 갔던 남성적인 자기주장의 한 형태로 포함시키고 싶었다. 그러한 힘줄들이 나에게 주는 매혹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쉽사리 파악하기 힘들지만, 분명 이것은 인간도 우연하게 형성한 한 풍경의 그림자, 시선의 울림이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미처 도로 한가운데 운전석에서 보지 못했던 공단들의 이모저모는 나에게 어쩌면 예술적 네트워크나 권위처럼 비친 것은 나만의 시니컬한 시각의 부산물이었을까? 







<지질학적 풍경, 부산>이라는 풍경들을 영상에 담으면서 나는 오랜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이 작업을 하지 않던 전과 후는 나에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공간들을 둘러보면서 내가 지닌 시선은 확실히 변했다. 도시 한가운데에 높은 시선의 밀도 속에서 지내던 나에게 부산의 지질학적 풍경들은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우선 그 풍경들은 아주 높은 곳을 오르지 않고는 (뭐, 사실 드론이라는 간단히 오르는 방법이 있다.) 좀처럼 그 오랜 드라마 속 패턴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시선의 자유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자유를 맛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간단히 '시간'이라고 부르는 단편적인 속도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우리는 먼 여행지를 찾아 종종 힐링을 하곤 한다. 전혀 다른 풍경과 사람들의 시선 속에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은 지혜임과 동시에 꼭 필요한 성장의 자양분을 얻게 한다. 그런데 내가 살아오던, 부산의 주변부 공간들은 단지 나에게 시점만 변하면 얼마든지 내가 속한 공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또 다른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수천만 년씩 쌓여가던 시간의 궤적과 나의 시선이 언젠가 이렇게 만날 줄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인간이 어떠한 욕망을 위해 단시간에 만들어 내었던 조형적 풍경들도 거대한 시간의 패턴들 속에서 어우러져 나름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일조하고 있었다는 것도 나에겐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이었다. 


생각해 보면 주목받거나 주목받지 않거나, 우리는 이미 그림 속에서 사는 것이다. 비록 주목받지 못할 수는 있겠지만, 또 다른 높이의 상상력의 시점에서 반드시 이어야 할 시선의 점들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artnsoul studio  https://vimeo.com/user2015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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