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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ug 31. 2018

보이는 것에 숨어있는 착시의 비밀

프레임안에서 보이는 것들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보편적인 지각을 지닌 관람자들에게 위의 사진은 십중팔구 고요하고 적막하게 흐르는 강의 풍경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풍경사진이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보일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이 사진이 또 어떤 사람들에게 대단하고도 실험적인 그 어떤 의미를 함축한 '메시지'로도 보일 가능성도 있는 것일까? 희박하지만 그러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의 말미에 다시 한번 언급해 보기로 하자. 



위의 그림에서 A와 B 중 어느 부분이 더 밝은 색이라고 생각하는 가? 아마 대부분은 B부분이 A보다 더 밝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정답은 'A, B가 동일한 색이다.'라는 것이다. 이 실험은 MIT 교수인 에드워드 아델슨이 했던 유명한 착시 실험이다. 이 실험은 생각보다 우리의 뇌에서 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사한 착시 실험들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환경에 의한 간섭을 받고 있는지 증명하고 있다. 인간은 대상을 인지 할 때 기본적으로 주위 환경의 관련성 안에서 적합하고 의미 있는 상태로 대상을 파악한다. 우리의 시신경과 뇌는 한마디로 의미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의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라고 하는 질문들을 종종한다. 시신경은 외부 대상을 유의미하게 반응하고 처리하도록 몇 가지 특징을 재빨리 파악해서 형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이 빛의 반사인지, 음영의 굴곡인지, 아니면 일종의 운동의 그림자가 망막에 투사하는 파동인지 일일이 파악하지 못한다.) 학자들은 이미 망막의 신경회로에서 우리에게 형태감을 인지하는 능력을 부여해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재현의 능력까지 부여했음이 틀림없다. 



 

형태는 분명 우리의 마음의 상태의 영향을 받고 의미를 결정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마음속에 재현하는 순간, 그 대상은 우리에게는 뇌와 마음에서 외부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믿음과 결부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뇌는 망막에 비친 그림들을 해석하고 이미 학습하여 알고 있는 의미로 그것을 해석하여 그려낸다. 이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확인하고 있는 '시지각'이라는 인식의 과정이다. 착시 optical illusion는 비록 부분적으로 닮긴 했지만, 하나의 시점에서 형태를 구성하는 신념 속에서만이 사실이다 -라는 믿음의 속성 같은 것들을 일깨워 준다. 



 Ratingen Swimming Pool,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Andreas Gursky 1984



확실하게 존재하는 외부세계의 풍경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어떤 명분이나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많은 뇌과학자와 작가들은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실존적인 존재에 관하여 끊임없이 탐구했던 것일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존재에 관한 마음의 착시와 믿음에 관한 의문들이, 이러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끊임없이 되살아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보이는 외부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어떠한 종류의 계시나 재구성에 확실한 욕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통념을 믿는다. 


두개의 신비 The Two Mysteries, 르네 마그리트 1966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는 꼼꼼하게 파이프를 그림을 그리고 그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써넣었다. 마그리트는 사실적으로 사물과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태를 드러내는 화가로 유명하다. 마그리트의 1928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66년도 <두 개의 신비>라는 그림에서 그는 좀 더 그 개념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그리트가 묘사하는 그림은 우리의 생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프레임에 닫혀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의 상태에 관해, 그러한 대상과 재현된 것들에 관한 불일치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1) 재현된 파이프 2) 실제 외부에 존재하는 파이프처럼 생긴 그 무엇 그리고 3) 프레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세 가지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일까? 혹은 모순된 공백이나 우리의 맹목적 믿음 같은 것들은 없는 것일까? 를 질문한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해 오던 언어, 재현된 것, 시각적으로 재현해 오던 형태들은 우리에게 오랜 흔적들을 남기고 일종의 관념을 만들어 낸다. 상식적으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 세계는 존재하겠지만, 사실 마음속에 우리는 이른바 통념을 만들고 믿게 된다. 그것들은 재빨리 외부세계와 우호적인 관련성을 만들어 주겠지만, 반드시 우리에겐 객관적으로 전달되는 것일까? 우리는 통념을 좀 더 쉽게 믿어 버리고 그것들을 확정적으로 만들려는 기제를 가지게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을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구성하기 힘든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반복된 패턴의 형태 속에서는 우리는 손쉽게 선택적 파악을 한다.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우리는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믿는 것을 보는 것일까? 우리의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고 그것이 외부세계에 있으므로 실존한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환경 속에서 특히 사람들은 통념의 안내를 받는다. 통념이라는 것은 재빨리 언어와 재현된 것들의 의미를 확정해 주고 우리는 그것을 믿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통념이라는 미리 설계된 회로를 반복해서 부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시점이 바로 세계관이다. 



현대의 사진가들은 독자적 시점을 사용해서 우리의 현실이 지닌 다양성과 유동성을 환기시키고자 노력한 결과물들을 보여준다. 그들이 사용한 것들은 시점이다. 프레임 안에 독창적인 시점과 움직임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현실이 가지는 독특한 모순과 확정된 시야를 알려준다. 우리는 특정한 시점에서만 세계를 바라볼 수 있고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좀 더 넓은 의미로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Hyper, 데니스 드라크 Denis Darzacq 


일정한 원근법의 세계에서 우리는 늘 통일된 세계에 관한 개념들도 아울러 가지게 되는데, 작가들의 독자적인 시점으로 묘사하는 현실세계들은 우리에게 기묘하고 생경한 감각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근법 안에서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만 비틀어도 우리는 풍부하고 더욱 생생한 세계관으로 옮겨 갈 수 있다. 이것들을 우리는 시각적 재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차원적 시점은 통념이 지니는 중력을 완화시키면서 어떠한 종류의 완고함을 해체시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시점을 활용하여 스토리텔링 한다는 것은 프레임을 되새김질해 본다는 것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곧 세계관이 된다. 프레임 안에 독자적인 시점을 담아낸다는 것은 나만의 세계관을 대상화하여 관찰해 본다는 것이다. 마그리트가 파이프를 아주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해 내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듯, 나는 나대로의 프레임을 만들어 대상을 나만의 시점으로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자적 시점은 또 다른 차원을 환기시켜준다. 



핑크앤블루 프로젝트, 윤정미작가 





통념을 벗고 새로운 시점과 재구성을 시도하는 것은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유목민적 방랑을 예고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현대의 작품들은 난해하고 설명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시점으로 사물, 공간, 시간, 소리까지 재구성하려고 노력해 온 것이다. 그것이 독자적인 방식일수록 창의적이면서 고유한 것으로 환영받아 온 측면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태도들이 종종 난해하고 심각함을 가중시켜 왔다는 불평을 듣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만한 학구적인 엄숙함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의 신념과 믿음들이 단지 설계된 통념의 회로 안에서 맴돌 수도 있다. 우리가 신념 속에서 설계되고 모든 것을 결정 가능한 '인간적인 주체'라는 믿음의 편향적인 회로에 관해 다시금 점검을 해 보기 시작했다는 데에서, 우리시대의 의미있는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다.  








시점의 재구성 


우리에게는 관심을 다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의 외부환경에 대한 관찰, 맥락, 관계를 제외하고 독자적으로 내재적으로 의미를 지니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물리학적으로도 인문학적으로도 커다란 도약과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지각은 주위의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착시가 가능한 제한적 지각 능력을 지니고 있다. 훌륭하게 진화했지만 인간은 환경과 관계의 흐름 안에서만 대상을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창조적 시점과 관찰은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단지 영감을 받는 다든 가, 천재적 발상을 어느 순간 깨우친다든가 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전문화된 나만의 경험 지식과 주변의 경계들과의 접점들을 효율적으로 찾아낸다는 것과 비슷하다. 나만의 경험과 기억이 반드시 나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내가 본 것이 반드시 나만의 공간에 존재했던 것이라고 단언하기 힘든 환경에 놓여 있다. 확정된 편향 속에서 지식을 무한정 습득하고 반복한다기보다는 열린 시점과 문들을 통해 다양한 통로들을 발견하고 재구성해 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창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위의 그림을 떠올려 보자. 무엇이 보이는 가? 글쎄 이것은 강변의 풍경일 수도 있고, 또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andreas gursky의 '라인강'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2011년도에 48억 원에 낙찰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작품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아직 우리들의 관점으로 이것의 미학적 가치를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또한 시점의 차원에서 이 작가가 바라보는 풍경이 지닌 (우리의 마음속에 지각되는 즉시 또한 기억으로 소멸해 가는) 기묘한 상실의 과정에 대해 어렴풋이 떠오르는 작가 만의 제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꼼꼼하게 사실적 풍경을 제작하고 묘사하는 구르스키의 풍경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원근법이다. 이것은 라인강을 묘사한 (혹은 우리 마음속에 그려지고 재현되는) 풍경이지만, 사실 그 너머에 있는 불확실한 지평을 은근슬쩍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상적으로 경직된 선들과 반복을 중요시하는 그의 이미지들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경직된 풍경에 관한 풍자적인 지적인 셈이다. 우주 속에 혼자 내던져진 뒤, 막막하고도 넘치는 시각적 풍경들 속에서 혼자만 실로 존재한다는 실존적인 자각을 그린 이 이미지는 단지 라인강의 풍경 만을 그려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라인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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