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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Sep 07. 2018

죽성리 가는 길에서 만난 골목 미술관

모든 것은 빛난다 

그날 내가 죽성리에 간 것은 시간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별 볼 일 없는 나의 생활이 또한 한심하게 느껴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네 집이 큰 폭으로 올랐다든가, 친구인 누군가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든가, 저 멀리 여행지에서 럭셔리한 셀카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소식을 보내오는 지인의 인사에도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때로 파도처럼 나의 키를 훌쩍 넘기는 우울감이 나를 휩싸기도 한다. 그래서 그날 나는 죽성리에 가보기로 했다. 죽성리는 여느 변두리 시골과 다를 바 없는 부산 기장군 부근의 조그만 마을이다. 근사한 여행사진을 기대했다면 조용히 발길을 돌리시는 것이 좋다.  









죽성리에 내리면 원래 드라마의 촬영지였다고 하는 죽성 성당이 반겨준다. 이곳은 젊은 친구들이 늘상 와서 셀카를 찍곤 하는 꽤 알려진 셀카 포인트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이는 모조품인 성당이지만 외롭게 서서 셀카의 주인공을 기다리는 나름의 풍경이 귀엽기도 하고 어딘지 서먹한 느낌도 있다. 대개 성당에서 사진을 찍고 근처 카페에서 발길을 돌릴 테지만, ‘길이 없다!’는 선언이 페인트칠 되어 있는 담벼락을 지나 두호마을 골목을 들어서 보면 여느 어촌마을과 다를 바 없는 고요하고 오래된 색감들이 담긴 풍경이 나를 반겨준다. 흡사 모더니즘 페인팅 같은 담벼락을 지나 오래된 대문들의 녹슨 철판 문들을 지난다. 이곳 대문들과 흔한 돌담은 그 자체로 훌륭한 조형물이자 설치미술이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벽화를 지나고 눈 아래로 담기는 푸르고 붉은 색칠이 된 지붕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곳 어촌 마을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공간감이다. 종종 ‘길 없음’ ‘개조심’이라는 다소 투박하고 불친절한 페인트 칠이 된 담벼락을 마주하지만 생각보다 골목 안은 무섭지 않다. 오히려 어느 미대생들이 그렸을 법한 벽화들이 정겹다. 우리를 압도하고 미로 같은 거미줄을 쳐놓은 거대한 건물 속 공간들이야 말로 우리를 어떠한 불안과 초조함 속으로 우리를 내 모는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나는 알 수 없는 오브제들이 설치된 담벼락을 만난다. 도대체 이 모든 물건들은 무엇일까? 이 집은 알고 보니 큐레이터의 까다롭게 선별된 작품들이 전시된 나름 태극기까지 설치되어 있는 '국립미술관(?)'이다. 조금 기묘하긴 해도 이런 골목길에서 만나는 독특한 미술전시회는 한참을 들여다보게 한다. 큐레이터의 정신세계나 취향을 종잡기가 어렵긴 하지만 분명 조금의 권위의식도 없이 이 전시회를 지나가는 방문객을 위해 기획했을 주인장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장군 기장읍 죽성로274번지 에 위치한 카페 - 디자인보이스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친구의 카페인 디자인보이스에 다다랐다. 이 건물은 친구 부부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몇 년을 다양한 일을 하다 주변 친구들과 함께 맨손으로 짓다시피 한 아담한 목조건물이다. 한 푼도 보태주진 못했으나, 집을 짓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오히려 천박한 문화소비의 일상에서 우울감만을 쌓아가던 나에게 노동과 삶의 값진 성과를 몸소 보여 주었다. 직접 일일이 그리고 제작한 그림과 소품이 그의 인테리어였다. 친구의 딸이 직접 벽에 그린 펑크 한 벽화가 손님들을 맞아주는 이 카페는 세상에서 유일한 수제 소품과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이 카페에서는 안과 밖이 이질적이지만 또한 어울리는 그림들을 그려내며 공존하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인 널찍한 테이블에서는 그냥 그대로인 시골 풍경이 날 것으로 펼쳐진다. 이 자리에서 앉아 오후에 다다른 햇살을 보고 있자니 이것이 그림인지 현실인지 묘한 몽롱함에 젖어들게 된다. 빛과 시간은 골고루 사물을 생기 있고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바깥의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과 안으로 가서 현실의 관련된 제각각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빛이 비치는 카페의 실내가 무척이나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우리는 안과 밖을 한번 쯤 생각해 볼만 하다. 풍경이나 사물이나 문화들이 바깥을 상상하게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계몽주의의 이론이라도 그것은 일종의 신경증적인 우울감을 잉태하지 않을까? 나의 내면 조차도 바깥 세계의 풍경이 온전하게 바라보기에 좋도록 담겨야 하는 것이다. 빛은 골고루 평등하게 우리의 내면을 비출 수 있기에 그렇다. 









친구가 모아 두었던 오래된 카메라들과 그가 그린 작은 제법 밀도 있는 그림들은 카페를 방문한 손님들에게 작은 미술관에서의 커피 한잔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이제 오늘의 외출을 마칠 때가 되었다. 차칫 오래된 것과 낡은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은 피해야 되겠다. 카페의 주인이 선사한 시원한  음료를 한잔 마시고는 나는 집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생각해 보면 시간과 빛은 평등하게 골고루 무한정 주어진 것이다. 


별달리 화려한 볼거리가 가득한 여행지는 아닐지라도 어촌마을을 걸으며 나는 변화무쌍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풍경들을 만나게 되었다. 빛을 가득 머금은 질감과 낡은 자국들은 시간이 무한히 이어지고 변화해 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분마저 준다. 걷지 않으면 결코 마주 할 수 없었던 유일한 풍경들은 진정 내가 그 시간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문화의 자극적인 감각들이 현실에서 주는 예민한 시청각이 아니라, 진정으로 쏟아지는 무한한 빛 속에서 삶의 여정은 변화를 묵묵히 마주하는 유목민의 심정으로 내딛을만 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끔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파도 같은 우울감이 주는 착시에 속지만 안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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