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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ug 10. 2018

작가 톰블리와 뮤지션 팻 매스니의 대화

즉흥연주에 관하여 

재즈의 연주나 어떤 그림들은 때로 '의미의 완고함'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의 상태를 드러나게 해서 시간, 혹은 반응의 흔적을 여백에 새겨놓고 우리에게 그것을 들여다보게 한다. (재즈의 그러한 방식의 즉흥적 대화적 연주기법을 improvisation이라고 한다.) 그러한 행위들은 나로부터, 아마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쉽지 않은 공감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사이 톰블리 Cy Twombly의 그림은 어떤 형태적인 단정이나 의미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어떤 회화적인 사조나 비평의 단조로운 용어도 허락하지 않는 듯, 잔잔하게 색과 끄적거림 글자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톰블리의 그림은 어쩌면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행위나 시간을 더 그림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해석의 빈곤으로부터 그의 그림은 오히려 글자의 시각적 요소, 빈 공간, 겹겹이 쌓인 상이한 색과 낙서와 소리, 시간이 허락해야 나타나는 일상 속의 낡은 물건들의 외형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단지 톰블리의 작업실이 있던 동네 골목 한 귀퉁이에 뛰놀던 아이들이 남겨 놓은 낙서에서 착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톰블리의 자세가 화단의 비평이나 사조들의 요란스러운 의미 과잉으로부터 멀찍이 한걸음 물러서 조용히 자신의 내면이나 시간을 들여다보며 작업을 행하는 어느 재즈 연주가의 자세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한동안 ECM이라는 레이블에 몸담고 미국의 형식적인 재즈보다는 좀 더 창의적인 작업을 해 내었던 팻 매스니 Pat Metheny 의 음악을 떠올리게도 한다. 



의도된 것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예술적인 자켓 이미지로 유명한 독일의 음반회사ECM에서 만든 매스니의 앨범 Rejoicing의 커버는 톰블리의 그림과 신기하게도 흡사하다. 


팻 매스니의 음악이야 말로 가장 자유로운 시각적 상태를 효과적으로 음악화한 뮤지션이 아닐까? 잔잔하고도 울림이 있는 그의 기타의 즉흥연주와 그의 음악의 밑바탕이 되는 다양한 시기의 음악 스타일을 아우르는 층층의 사운드는 이질적이면서도 하나의 시간 속에서 종합적으로 꼴랴쥬 된다. 팻 메스니의 상이한 형식의 음악 장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한 곡안에 담아내어 다른 시간 속의 태도나 음악적 흔적들을 시각화한 것이다.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 만큼 재즈와 클래식, 제3세계의 음악을 함께 융합하는데에 적극적인 연주자는 없었을 것이다. 재즈이지만 다양한 음악과 공간의 공존을 모색했던 팻 메스니


나는 팻 매스니의 ECM 소속 시절 커버 아트웍은 그의 음악의 이러한 시각적 상태를 잘 표현했다고 느낀다. 아예 톰블리의 작업을 닮은 (혹은 모방한) 재킷에서는 노골적으로 재즈의 즉흥연주와 회화의 시각적 관련성을 추구하고자 한 유럽인들의 태도를 잘 읽을 수 있다. 팻 매스니의 음악 역시 소리의 잔상이나 이미지의 연관성이 꿈의 상태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우리의 지각적인 상태를 음악화한 전형적인 뮤지션이니까.. 남미 어느 곳의 리듬, 관현학, 열띈 즉흥연주, 몽상적인 소음, 등등이 낡은 건물의 외벽과 낙서, 끄적거림, 무의식적 상태에서 느껴지는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상태 등등 말이다. 





라우센버그나 재스퍼 존스와 달리 사회 지향적인 제스처, 추상회화의 형태적인 흐름과는 거리감을 견지했던 사이 톰블리의 그림이 이제야 와서 현대인들에게 크나큰 공감을 주고 있는 사실을 알 것 같다. 팻 매스니, 세계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허비 행콕, 혹은 ECM 재즈 아티스트들과 같이, 이제 그림과 재즈 역시 우리가 사는 공간의 터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그것들은 형식이나 역사가 부여한 의미나 가치가 아닌, 일상 속 사물의 낡은 흔적이나 손때 묻은 책상과 낙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속의 시간과 더 연관이 있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작가였던 톰블리가 로마의 햇볕이 드는 작업실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과 마주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물론 그 과정들은 손쉽고 명쾌한 과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즈 연주가나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이나, 내가 쓰던 오래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내면이나 솔직함을 마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맑고 명징한 울림을 준다. 감히 단언해 보지만, 뛰노는 아이들이 많았을 작가의 작업실이 있던 골목 귀퉁이와 뉴욕의 어느 재즈 스튜디오에서 즉흥연주라는 몰입의 시간에서, 틀림없이 어떠한 차원의 대화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즉흥연주란 바꾸어 말하면, 직관적인 예감이 흐름을 만들어 내는 '대화'이자 친밀함의 음악이다. 산업적인 가공들이 점점 더 발달하는 시기에 사로잡힘으로부터 해방된 즉흥적이고 오로지 시간으로부터 나타나는 흔적과 색채감이 새겨지는 친밀한 '즉흥연주'가 점점 더 보기 드물게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명징한 끌적거림의 흔적은 골목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친근하게 남겨진 아이들의 낙서처럼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준다.  





사이 톰블리 1928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줄곧 로마에서 작업을 했다. 그는 서구의 대가들과 동시대 작가였으나, 화제를 몰고 다녔던 그 시기 작가들과 달리 2000년대에 들어서야 폭발적으로 재조명되었고 활발한 기획전과 회고전을 선보였다. 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쉬지 않고 몰두했으며, 2011년 로마의 작업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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