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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ug 19. 2018

권진아, fly away 그리고 자유

권진아 노래 감상법

대중가요를 우리는 통속 음악으로 분류하곤 한다. 가요나 팝은 대중들의 감정을 호소하거나 공감을 끌어낼 수는 있지만 진리를, 혹은 보이지 않는 차원을 이끌어내는 예술적 탁월함에는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고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가끔 나는 가요를 듣거나 팝을 감상하면서도 진리를(?) 깨우치기도 한다. 통속적이라는 단어의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는 고급이나 저급, 혹은 키취나 비상업적 예술을 분류하기에 적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우연하게 듣는 음악들, 사진들, 또는 기대치 않던 대화의 한 자락에서 어떤 깨달음을 만나곤 하지 않은가.



최근에 우연하게 나는 권진아가 부른 fly away라는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우선 뮤직비디오를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노래를 듣다 보니 드는 묘하게 와 닿는 구절들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이 노래는 한마디로 과거의 연인에게 더 이상 속박당하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겠다는 마음가짐이 담긴 노래이다. 가사로 유추해 보아서는 아마도 노래의 주인공은 참으로 진심으로 상대에게 마음을 쏟고 사랑으로 헌신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가사는 '아침에 확인한 핸드폰에 와 있는 니 문자를 보고선 기분을 잡쳤어!' 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 노래를 '자유'라는 키워드로 수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주인공은 가벼워져서 날아다닐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헤어진 옛 연인의 부질없는 미련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나'는 그만큼 빠져나오기 힘든 감정적 결부를 가졌을 것이다. 실제로 가사 속의 나는 사실상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노랫말 속의 자유와 기쁨은 그런 만큼 지난하고도 부단한 노력들을 극복하는 과정 속의 홀가분함이다. 그러한 심리적인 결부와 터널 속을 빠져나오는 감정적인 묘사들은 나에게는 커다란 현실적인 공감대를 주는 것 같았다.


반면에 뮤직비디오는 자유롭고 풍경과 공간 속에 인물들은 마음껏 뛰논다. 과감한 클로즈 업과 드넓은 부산의 바다와 건물들을 비추는 영상들은 아름답고 찰나적이다. 권진아라는 가수의 매력이 부각되고는 있지만, 아시다시피 인물 그 자체는 이 영상의 핵심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과 그 공간 속의 결부들이다. 순간 속에 놓인 우리들의 자유 - 그리고 밀려오는 현실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순간과 공간의 일부가 되어 누리는 기쁨들이 꽤나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든다.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 부산의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며 훌륭하게 그림을 완성한 제작진의 감각이 썩 좋았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국면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겐 나이테라는 흔적이 남겨진다. 그러한 상흔보다 더 커다란 선물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그 자유는 누구로부터의 자유인가? 처음부터 이 노래는 한때 연인이었던 상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 나로부터, 또는 내가 지닌 애착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 이것은 이제는 진부한 사랑 따위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주체적 자유를 누리겠다는 여성들의 홀로서기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좀 더 '진정한 자유'라는 보편적인 차원에 이르는, 누구에게나 있는 터널을 지나는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느낀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어 좋았어 너의 연락이...

또다시 나를 찔러보는 니가 뻔이 보여서, 썩 반갑지 않으니까.

니가 힘들어하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하나도 안 미안해서 미안해'


우리에겐 언제나 내가 믿고 의지했던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 지기로 결정하는 때가 온다. (한때 나를 투사하던 그 대상이 연인이든, 권력이든, 어떠한 주체적 기준이든 간에) 그것을 대체하는 그 어떤 대상을 또다시 투사한들 나에게 진정한 가벼움이란 것이 올 수 있을까? 나에게 나타나 사로잡히기를 권유하는 것들, 혹은 나에게 확실한 안정을 제공해 준다는 대상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속박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흔한 헌신들도 (혹은 그 대체물들) 우리를 얼마나 많이 배신하는 가.


노래의 주인공은 오히려 날기로 작정한다. 즉 비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만큼 가벼워 지기를 작정한 다짐은 썩 훌륭한 선택이다. 나는 이 노래가 우리가 누구나 한 번쯤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터널을 지나는 힘든 감정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뮤직 비디오에서 묘사한 것처럼 우리는 순간순간 속 바로 나 자신에 관한 여행자가 되어 볼 수도 있다.


이 노래의 이런 가사와 함께 끝이 난다.


'요즘은 모두 끝났지. 다시 오지 않겠지. 다시는 울지 않겠어.

이제 웃을 일만 남았네..'


자유를 만끽하고서 기쁨을 발산하던 앞부분의 감정과 달리, 이 부분에서 유달리 읊조리는 창법으로 마무리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힘없는 존재, 사랑과 결핍에 굶주린 연약한 사람이란 것을 실감해서가 아닐까? 우리가 약하기에 진부한 것들에 또다시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당장은 기쁨과 자유를 누려보자고 작정해 본다. 어쩌면 나 자신의 그러한 통속적 감정이나 진부한 생각들로부터 자유롭기가 가장 힘들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사실상 나는 나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임을 안다. 그래도 우리는 노력해 보는 것이다. 앞으로 쏟을 눈물과 불안한 예감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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