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적도 위 비행기 안에서
중력의 바깥에서
나는 삶의 가치에 관해 종종 그럴듯한 글을 쓴다. 일상과 존재의 숨은 그림에 대해 가끔씩 관조하거나 의미를 곱씹고 그 작은 빛이 드리우는 숨결을 기록하는 시간을 즐기곤 한다. 비록 내가 치열하게 나의 삶에서 이루어 낸 것이 없지만 이러한 시간 속에서 내가 기록하는 가치는 나름의 존재에 그럴듯한 생기를 만들어 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해서도, 또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나름의 철학을 세워놓은 듯하다. (모두에게 죽음을 꾸미는 형용사인) '아직은 아니지만 미래의 어느 날' 아마 나는 그렇게 죽음을 직면하겠거니..
비행기 밖에 비친 검은 구름 사이로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섬광은 놀랍고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동남아로 향하고 있었다. 짙은 어두운 밤 비행기가 적도를 지나자 점점 더 깊은 구름들이 비행기를 에워쌌다. 멀리 구름의 아래위로 번쩍이는 번개의 섬광은 나에게 어떠한 경외감과 명징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선사했다. 나는 비행기에서 아늑하게 그 그림들을 즐기며 안락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어느 순간 번갯불들은 비행기 주변을 굉음과 함께 몇 번을 내리쳤다. 더 이상 내게 그 어마어마한 자연의 풍광들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비행기는 더 이상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수천 킬로미터의 상공에서 흔들리며 굉음과 함께 구름 속을 뚫고 지나가게 되었다. 승객들도 모두들 비명을 질렀고, 나와 옆자리의 딸, 우리 식구들은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모두들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가치나 개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하나님!' 그저 고개를 숙이고 살려달라는 기도만이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수십 분간 아마도 나는 두려움 속에서 나의 생명을 하나님에게 빌고 빌었다.
나의 현실얼굴은 어디에?
물론 이 글을 쓰고 있기에, 비행기는 안전하게 그 구름 속 난기류를 빠져나와 다시금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원래의 궤도를 날았다. 나는 그 수십 분의 시간을 지난 한참 후에야, 살면서 몇 번 겪어 보지 못한 그 공포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닐진대, 그날 밤 검은 구름 속의 공포는 나에게 관념적인 어떤 미래와는 다른 현실의 어떤 실체적인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계기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겁 많고 나약한 어떤 존재인지를 함께.. 나는 신에게 무엇을 빌었던 것일까? 남보다 조금이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인지? 아니면 남보다 조금 더 애절하게 삶을 비는 먼지 같은 한 존재인지?
죽음은 나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사실 사실적인 그 무엇이 아닌지 모른다. (실지로 직면하지 않고는) 일종의 관념적인 문화나 형식, 혹은 윤리적 태도를 일컫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직접 죽음을 직면한 사람이 되지 않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것 아닐까? 죽음의 실체를 대면하는 것은 삶에 대한 또 다른 애착을 진정 직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때, 그 완전한 공포의 순간에야 삶에 대한 나의 처절할 정도의 욕망을 깨달았다. 내가 글이나 말로 짐짓 초연한 듯 말하던 그것은 어쩌면 내가 아는 죽음이 아니었다! 실지로 샤르트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에 굉장한 공포감을 호소하면서 비참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죽음의 실체를 만나는 일은 사실 내가 자연의 일부로 소멸한다든가 형이상학적인 태도나 관념이 아닌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공중분해되어 파편으로 찢겨져 나가 바다 위 먼지로 뿌려지는 상황이 죽음이다. 이 처럼 어처구니없이 마주치는 부조리한 의미 없음, 혹은 아무리 좋은 문장으로 스스로를 포장한 나라고 한들 한 번의 고려 없이 소멸되는 신의 무자비함, 그런 것이 죽음에 가깝다. 그날 나는 부끄럽게도 '살려달라고' 하나님에게 빌었다! 지나고 나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나 보이지 않은 그 공포 속에서 또한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깨달았다. 왜 그렇게 나는 그날 공포로 부르짖었을까?
'문화'라는 정체성
나는 - 내가 스스로 나를 존재시키지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 을 조심스럽게 떠올려 본다. 나는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애써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태도는 짐짓 소멸을 잊게 한다. 내가 하는 삶의 속에서, 이런저런 선택들은 애착이나 영향력으로 혹은 존재 조차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서 자존감을 드높여 준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에서 허공에서 생존을 위해 허우적 거리는 주인공들의 우주유영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탯줄로 연결된 생명의 상태를 끊임없이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위태롭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현존을 중력없는 상태, 위 아래가 뒤바뀐 시점으로 시각화 한 것 아닌가.
정말로 중동의 이슬람교도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미국의 미사일이 아니다. 맥도널드의 로고나 미키마우스, 우스꽝스러운 만화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문화의 얼굴들이다. 그들은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더 참을 수 없어한다. - 테리 이글턴
아마 나의 정체성 역시 '문화'로 구성이 가능한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가짓수만큼이나, 내가 얼마나 삶에 대한 선택적인 애착으로 결부되어 있는지 망각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 공포의 얼굴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 준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소멸과 부조리에 대한 불편함을 잊게 하는 또 다른 많은 선택들을 더욱 원하고 애착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보다도 불완전한 균형 상태라는 것을 나의 깊숙한 두려움은 알고 있다. 자동차가 아니라, 입원실이 아니라, 또는 어떤 직장의 사무실 안이 아닌 비행기 안 수천 킬로 지상 위의 공중에서야 공포를 더욱 뚜렷하게 느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현 존재의 (어느 곳도 확실하게 안심할 수 없다는) 그 불합리의 상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해 준 것 아닐까.
내가 성숙하고 적절한 어떠한 문화적 태도를 지니며 나를 순간적으로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자연과 세계의 질서는 때로는 현실의 무자비한 어떤 측면을 보여 주며 우리에게 공포의 얼굴과 부끄러움을 드러나게 한다. 나는 생각보다 내가 삶에 대한 애착과 (안심할 수 있는 인식이나 장소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주는 어쩔 수 없이 주는 우연하고도 거센 파도같은 고통을 준다. 그러한 자연과 죽음의 일부인 삶 속에서 마치 내가 선택했다고 하는 착시 속에서 형성하는 뒤틀린 삶의 애착, 그것을 나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극적으로 공포스러웠던 그 순간에 - 나는 두려움의 얼굴을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은 사실상 나의 또 다른 현실 얼굴이었고 또 다른 방식으로 미묘하게 나를 착각하게 하던 약간은 뒤틀린 욕망의 얼굴이었다. 내가 한 번쯤 그런 현실 얼굴을 한 번쯤 직면하고 바로 그것의 '죽음'이나 극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그러한 공포의 순간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