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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n Money in New York Jan 21. 2024

[100  챌린지] 단지의 독서노트_28

말이라는 동물

천 개의 파랑

저자 천선란

출판 허블

발행 2020.08.19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며 변모한 말들은 이 작은 마방에 정착했다. 한때는 식량이었고 가축이었고 운송수단이었던 이 짐승은 여전히 식량이기도 하고 가축이기도 하고 운송수단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인간들의 스포츠를 위해 출구가 없는 주로를 달리는 경주마가 되었다. 좁은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짐승들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일임과 동시에 유일한 생존수단이기도 했지만 복희는 유독 마방에 갇힌 말들의 눈을 오래 쳐다볼 수 없었다.

한때는 말의 위치가 다른 짐승들보다 서글프게 걸쳐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주인과 교감하며 한집에서 살 수 있는 운명은 아니건대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기에는 지능이 높았다. 사람들은 돌고래의 지능은 익히 알면서도 말 역시 돌고래와 지능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말은 인간으로 치자면 6세 정도의 아이큐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마방에 ‘갇혀’ 있다는 것과 연골이 나가 걷지 못하게 될 때까지 주로를 달려야 한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복희는 경마장으로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잠시라도 말들을 마방이 아닌 경마장 안 공원에 풀어놓도록 관리인에게 지시했고 손에는 말들이 좋아하는 당근과 각설탕을 함께 준비했다. 각설탕이 말에게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단 걸 좋아하는 말들에게 각설탕은 스트레스를 최단시간 안에 풀어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당보다는 스트레스가 최악이었다. 그래서인지 말들은 복희가 올 때마다 철창 가까이 다가와 콧바람을 뿜어내며 알은체를 해 왔다. 와봤자 고작 한 달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오는 바깥사람이었음에도 말들에게 복희는 언제나 잠시 나갔다가 들어온 식구였다. 복희에게 경마장 말 관리를 인계했던 수의학과 선배는 말의 눈을 오래 바라보지 말라고 충고했다. 눈을 마주치면 공격한다는 본능이 말들에게 있었나, 싶었지만 이유는 복희의 예측과 정반대였다. 복희를 데리고 처음 경마장에 왔던 날 선배는 말의 목덜미를 쓸며 말했다. 말 눈은 흑구슬 같았고 선배의 눈은 물방울 같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계획이 전혀 없다는 선배의 말이 그 순간 복희에게도 현실로 와닿았다. 선배는 이미 너무 많은 아이들을 가슴에 품었고 그 아이들만으로도 슬퍼할 앞날이 가득했다. 선배는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복희에게 이곳을 쓸어보라고, 만져주면 가장 좋아하는 부위라고 말했다. 복희는 말의 넓은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매끄러울 것 같은 피부에는 잔털이 가득 나 있었지만 예상대로 부드러웠다. 복희는 천천히 목덜미를 쓸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말의 체온과 숨결을 더 자세하게 느끼기 위해 선배의 목소리를 따라 눈을 감고, 소리가 피부를 통해 전달될 수 있도록 낮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선배는 복희에게 권한을 넘기고 제주도로 떠났다. 그 어느 동물보다 말을 사랑했던 선배였으므로 복희에게 제주도는 선배가 가야 할 종착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곳이 여정을 끝낸 종착지가 아니라 대피소였다는 것은 이 경마장에 온 지 1년 만에 깨달았다.

경주마는 수명이 짧다. 선수로서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수명이 짧았다. 에이스인 경주마는 몸값이 억을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했지만 이마저도 주로를 뛸 수 있을 때만 해당했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말이 아니다.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복희도 듣고 자랐지만 그 안에 내포된 박탈의 의미는 천지 차이였다. 인간 역시 이따금씩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언제나 회생 가능했다. 하지만 말은 말 취급을 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말은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얻지 못했다.

인간을 등에 태우고 달려야 했던 예전의 경주마들은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한들 탑승자의 안전과 무게를 배제할 수 없었으나 그 기수가 휴머노이드로 바뀌면서 탑승자의 무게는 줄어들었고 사고로 인한 죽음의 문은 완전히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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