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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n Money in New York Jan 29. 2024

[100 챌린지] 단지의 독서노트_37

한국화의 가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안견부터 앤디 워홀까지

동서양 미술사를 만든 사람들

저자 김영은

출판 청아출판사

발행 2013.10.15.


鄭歚 (1676. 1. 3~1759. 3. 24)

     조선 후기

     우리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여 우리나라 회화사상 중대한 획을 그었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 폭포>, <경교명승첩>, <연강임술첩>    

    

정선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동한 화가로,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중대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정선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이 수습되고, 조선 고유의 문화가 꽃피던 때였다. 각 분야에서 조선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데, 회화에서는 조선의 미를 담기 위한 노력이 활발했고, 학문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탄생했으며, 한글 시가 문학의 등장, 조선 한문학, 석봉체 등이 탄생하면서 문화적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정선은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종래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를 답습하던 데서 탈피해 우리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다.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산천을 현실적으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닌(이를 따로 실경산수화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조선의 독자적인 사상과 이념, 정취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수를 재창조했다고 평가받는다.

정선은 1676년(숙종 2) 1월 3일 한성부 북부에서 정시익과 밀양 박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39세, 어머니는 33세였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출산이었다. 명문이었으나 증조부 대부터 은거하여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아 아버지 대에는 가문이 매우 쇠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정선이 14세 때 아버지가 죽고, 그해 기사환국(숙종의 후궁인 소의 장 씨(장희빈)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에 반대한 서인들이 정계에서 축출된 사건)이 일어나면서 외가까지 타격을 받자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

어린 시절, 안동 김 씨 일문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문하에 공부했고, 《중용》과 《대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곤궁하여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양반이었기 때문에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서른이 될 때까지 가난 속에 살았고, 서른 살 무렵 김창집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갔다. 그는 중인 계급인 도화서 화원 사이에서 정치적 대립도, 긴밀한 교류도 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는 데 매진했다. 또한 사대부들과 교류가 잦았고,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김창집이 우의정에 오르면서 화원으로서 순조로운 생활을 했다.

정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11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이다. 스승 김창협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난 금강산행에 동행한 뒤 그린 것으로, <금강산내총도>,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불정대>, <벽하담>, <백천동장>, <옹천>, <고성문암관일출>, <해산정>, <총석정>, <삼일포>, <시중대> 등 산수 13면과 발문 1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필법과 묵법이 서툴기는 하지만, 훗날 진경산수 기법의 기초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듬해 금강산에 다시 다녀온 후 그린 <해악전신첩>은 현재 전하지 않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찬탄했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여행을 통해 다양한 화법을 구사한 정선은 60대 이후 진경화법을 더욱 성숙시켰다.

1721년, 정선은 경상도 하양 현감에 제수되었다. 한양에서는 신임사화(경종 즉위 후 연잉군(후의 영조)의 세제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한 사건. 노론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소론과 충역시비가 붙어 결국 불충을 빌미로 정계에서 축출당했다)가 일어나 그의 후원자들 다수가 죽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최고의 후원자였던 김창집도 정쟁에 휘말려 거제로 유배되었다 사사당했고, 그 충격 때문인지 얼마 후 김창업과 정선의 스승 김창협도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정선을 후원하고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 역시 줄었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한 후 상황이 반전되어 그림 주문이 잇달아 일어났다.

1726년, 하양 현감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온 정선은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순화방 백악산 밑에 집을 마련하고, ‘인곡정사(仁谷精舍)’ 또는 ‘인곡유거(幽居)’라고 불렀다. ‘정사’란 심신을 연마하고 학문을 전수하는 곳, ‘유거’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집이라는 의미이다. 말년에 인곡정사에서의 생활을 그린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는 정선이 스스로의 생활을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기록화도 즐겨 그렸는데, 의금부 요원들의 계모임에 참석했을 때는 화공을 시키지 않고 직접 <의금부계회도>를 그렸으며, 이광적의 회방연에 참석했을 때는 <회방연도>를, 이춘제가 청나라 옹정제의 황후가 죽은 데 대한 위문 사절로 떠날 때의 전별연 모습을 <서교 전의도>로 남겼다.

1733년, 정선은 경상도 청하 현감에 제수되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홀로 사색하며 그림을 그리던 정선은 이때 화원으로서의 원숙미가 절정에 이르러, 이듬해 생애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금강전도>를 완성했다. 현재 국보 제217호로 지정된 <금강전도>는 우리의 산수를 실경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항공 촬영을 하듯 하늘에서 부감하는 시점에서 그려진 이 작품에는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가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오른편의 날카롭게 수직으로 뻗은 골산(骨山, 바위가 많은 산)과 왼편의 부드러운 육산(肉山, 흙과 나무가 많은 산)이 강약으로 대비되며 조화를 이루고, 필선이 거침없이 힘차게 그어져 있음에도 세부 묘사가 매우 치밀하다.

1735년, 정선은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사이 둘째 손자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진경산수화풍을 계승하여 <노적만취도>, <양주송추도>, <대구달성도> 등을 남긴 손암(巽菴) 정황(鄭榥)이다.

환갑을 넘긴 정선은 이때부터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65세부터 5년간 양천 현령을 지내면서 각지를 답사하거나 순시하여 그림으로 남겼는데, 한강 줄기를 따라 유람하며 그린 《경교명승첩》과 경기도 연천의 임진강변을 그린 《연강임술첩》이 대표적이다. 또한 선비가 툇마루에 나와 화분에 핀 모란을 감상하는 자화상적인 그림 <독서여가>처럼 일상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그림 주문도 쏟아졌는데, 그의 그림 한 점은 논 몇 마지기 가격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70세가 된 정선은 임기를 마치고 인곡정사로 돌아와 오랜 벗 사천 이병연, 관아재 조영석 등과 교류하며 시와 그림을 나누는 한적한 생활을 했다. 정선은 이병연에게 초상화와 그의 서재 노촉재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만년의 걸작 <인왕제색도>와 <박연 폭포>가 탄생했다. 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는 비 온 후 인왕산의 경치를 그린 것으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인왕산의 바위가 원경 가득히 배치되어 있고, 그 아래는 짙은 안개에 감싸여 있는데, 산세와 수목들은 짙고 힘차게, 안개와 능선들은 옅게 표현되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면서도 박진감을 생생하게 살려 낸 걸작이다.

정선은 <박연 폭포>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광경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키는 기법을 사용했다. 폭포의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지는 모습이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가운데, 폭포수가 떨어지며 일어나는 하얀 포말을 강조하기 위해 양옆의 절벽을 짙은 먹으로 겹쳐 그려 강약을 강하게 대비시켰다. 이로 인해 폭포가 굉음을 울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역동성이 부여되어 있다.

 80세에 이르기까지 붓을 놓지 않고, 만년이 될수록 더욱 위대한 걸작들을 쏟아 낸 겸재 정선. 그는 독창적인 필치와 치밀한 관찰을 토대로 한 사실적인 묘사, 만년이 될수록 자연과 예술에 대한 원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적 회화를 창시했다고 평가된다. 정선은 1759년 3월 24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명성은 계속되었고, 강희언, 김윤겸, 정황 등이 진경산수화풍을 이어받아 진경산수화가 하나의 회화 장르로 정착되었다. 5060년 뒤에도 도성 안 집집마다 그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한 중국인이 조선을 방문해 직접 조선의 산천을 보고 난 후 “비로소 겸재의 그림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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