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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n Money in New York Feb 08. 2024

[100 챌린지] 단지의 독서노트_54

일본이란?

Where is Japan Heading?

Records of 30 years of Heisie

Sato Masaru

JAPAN

Publisher: Openbooks

Published: 10 MAY, 2021

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헤이세이 30년의 기록

저자 사토 마사루

번역 송태욱

출판 열린 책들

발행 2021.05.10.

힐스족이라는 신흥 부자

 북한과는 긴장 관계가 이어진 반면 한일 관계는 양호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있었고 2004년 「겨울 연가」로 한국의 예능 붐이 일었다. 기운이 꺾이기는 했지만, 지금도 한국 연예인은 인기가 있다. 파나 웨이브는 전자파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흰옷을 입고 있는 단체이다.

이해에는 롯폰기 힐스가 세워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라이브도어의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 등 롯폰기 힐스의 주민들을 힐스족 30 혹은 신흥 부자라고 불렀다. IT 산업으로 돈을 번 성공한 사람들은 세상이 동경하는 대상이 되었다. 격차가 확대되기 전으로, 노력하면 자신도 부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시기였다. 롯폰기 힐스가 게이티드 시티로 보였다. 미국 교외에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주민 이외의 출입을 제한하는 문으로 둘러싸인 동네가 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그것이 위로 뻗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이세이도 끝나가는 시점이 되어, 정말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도큐〉로 대표되는 다른 개발 업자의 경우는 저층에는 UR 임대 주택 등을 넣고 고층을 부유층에게 팔고 있다. 다시 말해 중산층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거지만 롯폰기 힐스는 중산층 이하를 완전히 배제했다. 이런 개념의 차이는 크다. 격차가 커졌을 때 롯폰기 힐스는 증오의 상징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큐 같은 개발 업자의 방식이 영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큐 등에는 중산층에게 단독 주택을 사게 하려는 사철(私鉄) 연선 문화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고 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농촌이나 전원 지역에 철도를 연결하여 시부야까지 몇 분, 메구로나 고탄다나 오이마치까지 몇 분 걸린다고 하며 샐러리맨 계층에게 교외의 단독 주택을 판다. 원래는 〈한큐〉의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31가 생각해 낸 것이다. 사실은 부자가 아닌 사람에게 부자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위를 보게 하여 꿈을 주는 거다. 그것이 도심 아파트 저층에 비교적 싸게 살 수 있는 구멍을 남겨 두는 문화로 문화로 연결된다. 계급 유화 사상이다. 하지만 롯폰기 힐스를 개발한 모리 빌딩은 고층의 사상으로 특화해 간다. 기업으로서는 대단한 돈벌이가 안 되는 층을 제외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 일이겠지만, 단절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사회의 긴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껏 일본의 주택에서 이상하다고 느끼던 일이 있다. 재해나 화재 위험이 있는데도 일본에는 아직도 목조 주택이 많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철근 콘크리트 주택이 더 낫다. 20년쯤 전에는 대형 주택 회사가 취급했는데 지금은 일부밖에 하고 있지 않다. 역시 부서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1백 년 이상이나 버티는 철근 콘크리트 주택이 보급되면 주택 산업의 성장이 멈춘다. 주택 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인은 역시 대규모 파괴를 전제로 살고 있다.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도 파괴되는 것은 당연하다. 쓰레기 더미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이미 반영된 상태인 것이다.

「고질라」와도 통하는 사상이다. 그만큼 파괴되는 영화가 허용된다는 의미에서. 원폭, 공습, 대지진, 대형 쓰나미 그리고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고질라. 일본인은 파국(대변혁)과 함께 살아왔다. 일본 문화는 파괴와 재생과 분리할 수 없는 셈이다.  사토 일본에서는 파국 후에 꼭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파국 후에도 일상은 계속되지요. 이를테면 「홍백가합전」에서 「가는 해 오는 해」로 옮겨 간다는 이미지 아닐까. 어쩌면 순환해 가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소생과 파괴가 끝없이 되풀이된다. 그것은 종말 사상을 가진 그리스도교에는 없는 감각이다. 파괴와 재생이 세트가 되어 있는 일본에는 진정한 종말론이 없다. 그것은 신도의 〈나카이마(中今)〉33로도 연결되어 있다. 모두 〈언제든 지금〉으로 끝나고 만다. 일본인은 〈영원한 지금〉을 아주 좋아한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지지율만 신경 쓸 때의 정권이 보이는 자세와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 오늘의 형세만 신경 쓰며 내일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한 지금〉을 추구하는 정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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