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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RAVEL Oct 23. 2017

히치하이커와 길 위의 얼굴들

artravel vol. 20

히치하이커와 길 위의 얼굴들

아이슬란드│정양권


ⓒ정양권

운전 중 히치하이커를 지나갈 때면 죄책감을 자주 느껴.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애써 외면 하는 나와 자주 마주해.


오늘은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렸지. 

오늘도 역시 난 첫 히치하이커를 지나쳤어.


그들은 둘이었지.


내 차엔 자리가 부족했다며,

애써 내 자신을 위로 하던 중


너를 발견한 거야.

그렇게 우린 만난 거야.


ⓒ정양권

힐링 트럭


높이를 알 수 없는 자동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설 줄 몰랐는데 멈춰서 놀랬고, 어떻게 타야 할지 몰라 또 한번 놀랬다. 어리바리 당황해 하는 사이 보조석쪽 문이 빼곰히 열린다. 얼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방 먼저 올려 봐요."


낑낑대며 가방 엉덩이부터 올려 보지만 쉽지가 않다. 다행히 위층에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으로 두 차례 시도 만에 탑승 신고식을순조롭게 마쳤다. 더 지체했다면 민망함을 떠나 미안함 마음이 컸을 것이다. 날 태운 탱크같은 트럭이 서서히 움직인다.


"시야가 어때요? 괜찮아요? " "네! 매우! "


대답을 하며 처음 보는 현란한 각종 계기판들 사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높이에서 보는 풍광에 정신이 팔렸다.


"아파트 2층 가까이 되는 높이입니다. 차는 매우 튼튼하니 걱정 말아요. "


그는 하이랜드를 뚫고 동쪽에 있는 숙소로 가는 중이었다. 독일에서 살지만, 유럽 전역에 출장을 다닌다고 했다. 아이슬란드는 이번이 세 번째. 우리가 타고 있는 특수차량은 일반 자동차나 헬기가 접근하기 힘든 곳에 가서 도움을 주는 차라고 한다. 길이 없는 곳을 주로 다니며, 길을 새로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 가신다고 하셨다. 비록 악당을 물리치러 가는 히어로는 아니었지만, 죽은 기계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가진 방랑 맥가이버였다. 아이슬란드는 겨울에 눈에 파묻혀 전기가 나가면 손쓸 길이 없어 여름에 월동준비를 단단히 한다고 한다. 산악지대에 있는 발전기를 고치며, 사람들이 추운 겨울을 잘 보낼 수 있게 확인작업 및 수리를 하셨던 것이다. 집과 같은 차에 몸을 싣고 그는 일을 하며 여행을 다녔고 또 그렇게 삶을 살았다.


ⓒ정양권

좀 우스운 이야기인데, 아저씨를 보니 학창시절 꿈이자 로망이었던 허준이 생각난다. 학창시절 허준과 예진아씨를 보며 한의사의 꿈을 키웠다. 전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끝없는 시청률 기록을 세워나간 역대급 드라마. 중간고사 시험당일 전날에도 난 매번 허준 앞에서 맥을못 추렸다. 그렇게 허준 신드롬에 빠져 고등학교 3년동안 줄곧 내 꿈은 한의사, 한의사였다. 침 하나 들고 아픈 사람들 치료하며 세계를 돌아 다니는 미래형 허준 말이다. 하지만 대합입시, 행운의 여신은 내게 두 번이나 등을 돌렸다.


시간이 한참 흘러 난 서른이 되었고,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의사란 직업은 처음부터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는점. 나는 내 몸에 맞는 사진가란 직업을 훨씬 더 사랑하게 되었다. 몸보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몸이 불편해도 마음이 건강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도. 허준을 만든 건 손오공의 여의봉 같은 작은 만능침이 아니었다. 허준을 만든 건 침이나 침술이 아닌 아픈 사람들을 품었던 마음이었다. 마음을 품는데 직업은 중요하지 않았고, 나이 역시 문제될 리 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사진가로 살고 있지만 언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잘 모르겠다. 보여지는 모습이 바뀌는 거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저 멀리 날려 버린 지 오래. 오히려 10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겠지. 20살. 내 꿈은 끝나 버린 줄 알았는데, 30살이 되어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내 꿈은 아직도 허준처럼 사는 거다.


ⓒ정양권

한류와 난류가 섬 주위 전체에서 진한 만남을 갖는 곳. 

이곳의 기류는 아이슬란드 특유의 날씨를 만들었다.

예상하기 힘들고, 변덕스럽고 까탈스럽다. 

그래서 언제나 한결같이 인간이 세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니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신에게 묻는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양권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인연의 인연을 따라가다 보니 오늘은 안락한 다락방에서 따뜻한 아침을 맞게 됐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주방으로 가보니 내 자리 식탁 위에는 막 구운 빵 두 쪽과 플레인 요거트 하나, 파란 네모 상자 안에 든 우유와 딱 좋은 양의 오렌지 주스 한 잔, 그리고 치즈와 햄에 더해 직접 만든 잼이 놓여 있다. 나를 위해 차려진 아침상이 얼마 만인가. 이곳에서 좀처럼 텐트족 신세를 면치 못했던 터라, 집안의 포근한 온기를 머금은 집밥이 무척 그립고 간절했다. 일용할 양식을 앞에 두고 앉자 마치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자 집주인 힐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커피를 내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에게 묻는다.


"오늘 계획은 뭐예요?" 

"네? 정해진 건 없는데, 날씨가 좋아서 동네를 좀 돌아다녀볼까 해요."

"남편이 곧 양 목장으로 출근할 것 같은데, 우리 막내 아이가 따라가고 싶어 해서 남편이 데리고 가려나 봐요. 괜찮으면 같이 가 봐도 좋을 것 같은데."


아이슬란드에 머물면서 양을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다. 여러 번 길이나 도로 위에서 양들과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떨어져서 바라만 보곤 했다. 양은 원래 눈이 어두워 시야 거리가 굉장히 짧다. 괜한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녀석들의 행로를 방해하게 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곳에 있는 양들은 유난히 뽀얀 털이 복슬복슬한 게, 동화 그림 같아서 꼭 한 번쯤은 아주 가까이 가서 안아 보고 싶었다. 이렇게 기회가 오다니, 흔쾌히 따라나섰다.


힐두의 남편인 구르멘뚜르와 두 살짜리 어린 아이와 함께 목장으로 향했다. 그에게 작게나마 도울 일이 없는지 물었다. 그는 힐두와 닮은 그 미소를 지으며,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아이슬란드의 8월은 겨울 양식을 준비하는 때다. 구르멘뚜르 목장도 겨우내 양들을 먹일 건초를 정리하는 작업 중이었지만, 대부분 기계로 하는 일이라 막상 내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마음 편하게, 그냥 목장 구경하다 가면 돼요. 억지로 뭘 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그는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양권

목장에는 구르멘뚜르와 닮은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얼핏 중년쯤 돼 보였는데, 사춘기 십 대 소녀처럼 몹시 수줍어하며 나와 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을 본 구르멘뚜르는 그녀를 다독이면서 여동생이 낯을 많이 가린다고 말했다. 그 뒤 나를 데리고 나와 목장 여기저기를 안내했다.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건초를 보관하는 곳간부터 양들이 먹고 잘 수 있는 보금자리까지, 살뜰하게 꾸린 공간들에서 정성이 느껴졌다.


구르멘뚜르는 건초 정리 작업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우유가 가득 담긴 상자를 이고 반대편 울타리로 걸어갔다. 고소한 젖냄새를 맡아서인지, 그가 다정하게 부른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새끼 양 여덟 마리가 울타리 안으로 몰려왔다. 그가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양들은 달려들어 허겁지겁 우유를 먹기 시작한다. 구르멘뚜르와 그의 여동생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먹이기 위해 한시도 양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족히 십리터도 넘을 많은 양의 우유가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듯 순간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먹성 좋은 새끼 양들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미처럼 먹인다는 그에게 나는 되물었다.


"그럼 이 양들의 어미는 어디에 있어요?"


어미 양은 새끼들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 새끼들을 따로 이렇게 먹이지 않는다면 굶어 죽을 거라고도 했다. 다른 어미 양들은 이 여덟 마리의 새끼 양이 죽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한다. 양은 자기가 낳지 않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일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양의 본능이라고.


ⓒ정양권

그 얘기에 속이 상할 정도로 마음 한 켠이 추웠다. 따뜻해 보이는 털 안에는 차가운 본능이 있었다. 본능이라는 게 더 씁쓸하다. 우리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 윗집, 아랫집에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내 일이 아니고 알 바 없다고 모르쇠로 구는 일이 양의 세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까. 내가 남부러워 하는 곳에 취업을 했다며, 청년실업에 대해 뒷짐을 지며, 자연재해나 산업재해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모습이 어미 양들과 무엇이 다른지 아무리 생각해도 찾지 못하겠다.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함께 목장에 다녀왔던 구르멘뚜르의 두 살배기 아들이 거실에서 양 인형 입에 우유병을 갖다 댄다. 오늘 목장에서 봤던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빠를 꼭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커서 살게 될 땅은 내가 나고 자란 세상과 비슷할지, 다를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정양권

바다의 왕


바람을 타고 아이슬란드를 떠돌다 웨스트피오르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에 표류하게 되었다. 신세를 지고 있는 마을 신부님에게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마음을 순수하게 털어 놓았다. 바다사람을 만나 보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어부가 한 명 있어요. 몇 년 전 그의 부모님 장례식을 치르느라 알게 되었거든요. 제가 한번 연락 해 볼게요."


하지만 이메일도,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는 그와 연락하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첫 번째 연락이 왔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남부에서 매년 열리는 뮤직페스티벌에서 휴가를 보내고 올 거라는 비보였다. 이 후 그로부터 별다른 연락이 없었지만, 나홀로 매일매일 마음 속으로 그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렸다. 핑게리 마을을 떠나기 이틀 전, 신부님 댁에 그의 아내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해가 질 무렵 항해를 마치고 그가 돌아 올 거라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은 극적으로 항구에서 만남을 가졌다.


걸어서 5분거리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가 혹시나 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가진 않았을까, 불안한 마음에 차를 타고 항구로 향했다. 다행히도 그는 아직 남은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잡은 물고기의 무게를 측정하고, 피쉬 마켓으로 보내는 일이 끝나서야 나와 눈이 마주칠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수줍게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 역시 수줍은 미소로 답을 한다.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언제부터 바다에서 생활을 하신 거예요?" 

"열 여덟 살 때부터 바다 위에서 선원생활을 했지. 20여년간 세계를 돌아 다니며, 궁금했던 곳들을 직접 가서 확인을 했어. 그래야 직성이 풀렸거든. 혈기가 넘쳤지."


어부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옛 추억을 더듬으시며,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40대가 되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태어난 아이슬란드만한 나라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육지를 돌아 다니는 트럭, 버스 기사생활을 했어. 시간이 내게 허락되는 한 아이슬란드 구석구석을 구경 다녔지. 사실, 어부 생활을 다시 시작한 건 오래지 않아서야. 다시 바다가 그리워지기 시작 했거든.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는 3년 전에 새로 구입한 배야."


그는 외지에서 무턱대고 찾아온 나를 살뜰하게 안내하며 배의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배의 앞머리엔 큰 낚싯대 여러 대가 설치 되어 있었다.


ⓒ정양권

"할아버지, 항상 궁금했던 건데, 아이슬란드 바다에서 어부 생활,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지. 물고기가 내 마음대로 잡히지 않을 때도 있고, 변덕스런 날씨 덕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적도 있었지. 이제야 깨달은 건데,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일이 있어서 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좋은 일에 감사할 수 있었던 거 같아. 좋은 일들만 내 인생에서 계속 일어났다면 내가 어떻게 작은 것들에 고마울 수 있겠어. 오늘은 그래도 제법 잡았어. 측정해보니 537키로 정도 나오더군."


"537? 엄청 많이 잡으신 거 아니에요? 알고 보니 할아버지 마을에서 소문난 부자 아녜요?"


"하하. 그건 아니야. 최근 아이슬란드 정부가 어량이 예전 같지 않다며 개인어선들에겐 주4일만 고기잡이를 허용했거든. 뭐, 덕분에 3일은 마누라랑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됐지. 바뀐 정책덕분에 오히려 더 재밌게 인생을 즐기게 되었어. 더 늙지 전에 좀 더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되지 않겠어?"


그는 삶의 작은 배신들을 어떻게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는지 모든 비밀을 다 풀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혹시 이곳 아이슬란드에서 그가 특별히 아끼는 장소가 있는지 물었다.


"음... 배를 끌고 한적한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있을 때 그곳이 내게 제일 소중한 장소야. 파도 한 점 없이 거짓말처럼 고요할 때가 있어. 그물을 던지고 고기들을 잡을 때면, 마치 내가 바다의 왕이라도 되는 느낌을 받지. 바다를 다스리는자 말이야. 또 겨울에 눈이 올 때면 종종 마을 뒷산에 올라가.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는 걸 조용히 혼자 바라보지. 이번엔 잠시나마 산의 왕이 된 흥분된 느낌을 만끽하지. 조용히 그것을 즐기다 내려 온다네."


할아버지는 시계를 슬그머니 보시더니 집사람을 보러 가야 한다며, 악수를 하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며 발걸음을 옮겼다.


"호기심이 지금껏 내 인생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호기심 또한 지나쳐선 안된다는 걸 시간이 꽤 지나서야 알았다네. 세상에는 이유가 있는 일보다 없는 일들이 더 많다네. 이유를 찾는데 인생을 허비하지나 말게나."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한계에 부딪혀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양권

조금만 더 


그녀는 불룽가릭에 사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우리는 행선지가 같다는 이유로 함께 차를 탔다. 태국을 떠나 아이슬란드에 온 지 15년이 넘었다고 했다. 서로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더이상 아이슬란드에 못 살겠다며 하소연을 시작한다. 아이슬란드 정부에 굉장히 불만이 많아 보였다. 지구별 반대쪽 사람들이 극동이라 부르는 한국에서 온 내겐 굉장히 어리둥절한 소리였다. 아이슬란드가 싫다니. 하긴 어떤 나라든 아픈 부분은 있는 거니까.


물가는 오르고, 임금은 동결, 작업환경은 점점 악화된다고 하셨다. 10년을 넘게 전국의 피쉬 마켓을 돌아 다니며 일을 하셨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인들이 기피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일자리를 얻기엔 상대적으로 쉬웠다는 말과 함께. 고향 친구들 또한 같은 직장에 많이 있다고 하셨다. 우연히 자동차 핸들에 놓여진 그녀의 손에 시선이 갔다. 주름이 깊게 패인 거친 손이었다. 아이슬란드에 둥지를 틀었던 시간에 비해, 그녀의 영어가 조금 서툰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외딴 얼음섬에서 자식들 생각을 하며 말없이 생선 손질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양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저축을 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지금 자기가 몰고 있는 큰 차도 생기고, 작은 집도 생겼다고. 하지만 이제는 이곳에서의 삶이 너무 지쳐 다시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몇 년째 외마디 다짐뿐,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벌어서 집으로 가자, 조금만 더 하자'는 마음이 그녀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고. "이제는그리운 고향 땅에서 남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난 몹쓸 욕심만 커져 버린 것 같아. 이제 내가 꿈꿔 왔던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 버렸어."


조금만 더 버티자. 나는 이 말에 몹시 힘이 빠진다. 그냥 오늘을 사랑하면 안될까. 어렸을 때는 오늘을 버티면 빛나는 내일이 올 거라는 달콤한 거짓말을 믿으며 살아갔다. 하지만, 오늘을 버티면 내일도 버텨야 했고, 버팀의 연속이라는걸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오늘 누려야 할 행복을 계속 뒤로 미루며 사는 바보처럼.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사랑할 수 없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새로운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시작하는 용기만큼 그만두는용기가 필요하다. 무엇이 불안한 건가. 지금까지 쌓아온걸 버린다는 게, 다시 시작한다는 게 그렇게 두려운 건가.


나는 오늘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게 그보다 훨씬 더 두렵다.


글│정양권

사진│정양권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www.artrav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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