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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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직 눈 앞에 내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달리는 것을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왔지만,
아무리 페달을 돌려도 제자리인 듯한 길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땀과 막혀오는 호흡과의 싸움은 너무 힘겹다.
이윤혁의 일기 중에서
베토벤 최후의 작품 현악 4중주의 마지막 16번 악장이 시작되는 악보에는 작은 글귀로 된 메모가 적혀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그래야만 했 나? 그래야만 했다!)' 삶의 끝자락에서 악보를 쓰며 베토벤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던 듯하다. 그때 그래야만 했나. 이 질문이 어떤 사건을 향한 것인지, 삶 전체를 돌아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은 자문과 더불어 확신에 찬 자답으로 완성된다. 그래야만 했다.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은 암투병중인 청년 이윤혁의 마지막 선택과 도전을 담은 영화다.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윤혁은 자신의 삶을 병원에서 마무리 하는 것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윤혁이 선택한 마지막 3개월의 삶은 병원을 박차고 나가 자전거를 타고 '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를 완주 하는 것. 이쯤 되니, 묻고 싶어졌다. 그는 정말 그래야만 했나.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면 사랑하는 가족과 일주일이라도 더 함께할 수 있는데, 꼭 무리한 도전을 해야만 했나. 영화 속 윤혁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도로 위에서 끊임없이 자문한다. 꼭 그래야만 했나?
그리고 영화는 윤혁의 도전 과정을 통해 확신에 찬 대답을 건네며 완성된다. 그래야만 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꿈과 열정을 과잉 요구하는 사회라고 불린다. 어디서부터 양산되는지 모르겠으나, 청춘은 당연히 아파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고, 천 번을 흔들려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어느 샌가 꿈을 향한 열정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채찍질하는 수단이 됐다.
스물여섯 청년 윤혁의 도전은 이런 대한민국 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를테면, 왜곡된 단어 바로잡기다. 꿈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장 선명하게 긋기 위한 수단이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갖는 것이다.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 바로 꿈이다. 윤혁은 프로사이클러도 아니고, 자전거 전문가도 아니다. 그저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몇 차례 수술을 마친 뒤, 죽음을 앞두고 선택한 도전은 바로 자신의 꿈, 뚜르 드 프랑스로 향하는 것이었다.
윤혁은 꿈을 통해 삶을 선명하게 그어 나갔다. 역설적이게도 윤혁의 모든 것이 가장 흐려지는 시간에 삶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영화는 윤혁의 도전을 통해 말한다. 타인의 꿈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꿈을 꾸는 것. 때론 무모하고, 어이없고,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삶을 선명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은 엉성하고 허무한 성공으로 이루어진 영화다. 자기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꿈이라고 한다면, 그 모양과 크기는 지구상에 존재 하는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것이 될 수 있다.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해서 꼭 유명해지거나,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성공이라고 해서 꼭 멋진 장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기 자신이 만족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면 그만이다. 윤혁의 도전과 성공도 그랬다. 때로 허무해도 상관 없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스스로 행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은 아트래블이 꼽은 이 영화 최고의 엉성한 성공 장면들이다.
우상 렌스 암스트롱과의 재회
윤혁은 암을 이겨내고 뚜르 드 프랑스의 영웅이 된 렌스 암스트롱을 동경해왔다. 암스트롱이 방한했을 때도 사인회에 직접 찾아가 사인을 받았을 정도. 그런 암스트롱을 뚜르 드 프랑스 출발선에서 다시 만났다. 윤혁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스타 암스트롱이 자신에게 인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히 대꾸할 수는 없는 일. 윤혁은 자전거를 타고 자신을 지나쳐간 암스트롱을 두발로 뛰어 쫓아갔다. 그리고 물었다. "DO YOU REMEMBER ME?" 그의 질문에 암스트롱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YES" 대답을 들 은 뒤, 윤혁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윤혁의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완주에 성공하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프로 선수의 일정과 아마추어 선수의 일정은 다르게 편성된다. 프로 선수들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달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뚜르 드 프랑스는 프로 선수들이 결승점을 지나는 모습. 수많은 인파가 나와 환영하는 것은 그때 뿐이다. 선수들보다 며칠이나 늦게 결승선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반겨주는 이는 없다. 교통이 복잡한 파리 시내를 달려 끝내 결승선인 개선문에 윤혁이 도착했을 때, 너무나도 일상적인 속도의 사람들이 윤혁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관심이 없다. TV에서 보던 환호도 없다. 오직 함께 완주를 도와 준 팀 사람들과 성공의 기쁨을 나눌 뿐이었다.
비록 제 꿈이 병을 더욱 키웠다 할지라도,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마음껏 달릴 수 있었으니까요. '뚜르'는 제게 선물이에요.
이윤혁의 영화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중에서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의 주인공은 당연히 윤혁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빛나는 이유는 숨은 인물들의 역할 때문이다. 윤혁의 도전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무명의 후원자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후원한 428명의 후원자들이 없었다면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과 청년 이윤혁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윤혁의 마지막 도전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하며 동행의 기적을 몸소 보여준 사람들이 있다.
프로젝트 총감독 / 전일우
윤혁이 '뚜르원정대'라고 부른 드림팀을 총괄하는 프로젝트의 책임자. 각기 다른 주장과 취향, 관심사로 불거지는 작은 불화들로 옥신각신했던 팀의 중심에서 모든 불평불만을 감수하며 현장을 이끌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팀원간의 분열을 온몸으로 중화시키던 전일우 감독은 영화가 완성된 뒤 이렇게 말했다. "꿈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이루는 것이다."
자전거 메케닉 / 윤학병
윤혁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윤학병이라고 말할 것이다. 해병대 출신 특유의 우정 나눔 방식을 영화 속에서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영화 끝 무렵 프랑스에서 만났던 한인 민박집 사장과 재회하는 장면이 압권. 학병은 한인 민박집 사장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자, 손에 든 우산을 길에 던지고는 두 팔 벌려 민박집 사장을 껴안는다. 사실 학병이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려서 누님을 암으로 잃은 경험 때문. 누군가 그랬다. 아픈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건, 더 아픈 사람이라고.
팀 닥터 / 이남규 팀 닥터
이남규는 학병과 쌍벽을 이루는 캐릭터다. 평소 자전거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지인의 부탁을 받고 이 프로젝트 팀에 합류했다. 모두가 윤혁의 도전 앞에 열악한 환경을 참아내지만 남규는 다르다. 불만 폭발이다. 처음에는 얄미운 캐릭터였다가 뒤로 갈수록 남규의 뜻밖의 재능이 빛을 발하게 된다.
라이딩 파트너 / 이장훈
실제 뚜르 드 프랑스에서 참가하는 프로 선수들은 대부분 라이딩 파트너와 함께 출전한다. 라이딩 파트너는 일정 구간까지 선수 앞에서 주행하며 일종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 사람. 장훈이 맡은 역할이 바로 윤혁의 라이딩 파트너였다. 하지만 장훈 또한 윤혁보다 월등히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은 아닌지라 간간히 윤혁의 뒤(?!)에서 달리곤 했다. 그때마다 스스로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훈이 함께 달려줬기 때문에 이 도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지 코디네이터 / 임영석
숙소를 섭외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운전하고 길을 안내하는 역할 등 프랑스 현지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일을 담당한 일당백 현지 코디네이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일이라고 여기며 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가 윤혁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버린 사람이다. 프로젝트 중반까지는 불화의 중심에 서기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영석은 진가를 발휘한다.
포기하고 싶다가도 나를 위해 수고하는 수많은 스텝들,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나의 꿈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다시 페달이 빨라진다.
알 수 없는 바람이 나를 점점 앞으로 떠민다.
가자, 이윤혁!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이윤혁의 일기 중에서
영화는 뚜르 드 프랑스를 마치고 돌아온 이윤혁의 남은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모든 삶과 죽음의 힘을 가득 담아 보는 이를 흔든다.
글│아트래블편집부
사진제공│리틀빅픽쳐스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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