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vol.20
안데스│콜롬비아│탁정민
남미 여행 중 그 어느 곳보다 콜롬비아를 손꼽아 기다렸던 단 하나의 이유. 안데스 트래킹이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우연히 보게 된 KBS 다큐멘터리 「영상앨범 산」이 화근이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안데스는 낯설고 신비로웠다. 평소 여행과 자연을 좋아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장소의 사진과 영상을 찾아본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 정도가 아니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못 말리는 호기심과 열렬한 동경심이 솟아났다. 열병이 시작된 것이다. 여행의 열병. 지구 반대편으로 가야만 했다. 안데스 일부라도 모험하며 날 것 그대로의 대자연을 몸소 느껴야만 했다. 나는 지금, 안데스의 어느 작은 산등성이에 앉아있다.
콜롬비아 로스 네바도스 국립공원은 해외 트래커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속 시원한 정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파편처럼 흩어진 정보를 찔끔찔끔 맞춰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다큐멘터리에서 트래킹의 시작점이 되었던 살렌토(Salento)라는 마을 이름을 기억해낸 것. 일단 그곳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콜롬비아 북동쪽 퀸디오 지방에 위치한 고산지대의 마을로 향했다. 보고타에서 아르메니아까지 버스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굽어진 산길을 10시간 가까이 달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시 작은 버스로 갈아탔다. 그리고 1시간쯤 지났을까. 장장 11시간 만에 살렌토에 도착했다.
살렌토는 몇 시간이면 다 둘러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산골 마을이다. 해발 2,000m 즈음에 위치한 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곳이다.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구름으로 덮이면서 갑자기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다가도, 어느새 다시 쨍하게 개는 일이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과 개들은 느긋하기가 짝이 없다. 이런 극적인 날씨 변화에 당황한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던가. 그 와중에 커다란 나무 잎사귀 아래서 비를 피하는 고양이가 또 얼마나 귀여운지 한참을 바라봤다. 진정 난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살렌토는 개발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마을.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다. 역사 깊은 건축물도 없고 화려한 레스토랑이나 근사한 관광명소 역시 없다. 이밖에 또 없는 것들이 있다.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다. 눈과 코가 매워지는 탁한 매연과 마음을 옭아 매는 조급함과 치열한 경쟁도 없다. 화려한 것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살렌토. 없는 것이 많아서 시시하고 재미없는 곳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수더분함이 좋았다. 살렌토에서 높다는 것은 오로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고요한 산 뿐. 티끌 없이 청명한 초록빛만이 유일하게 눈을 시리게 하는 색이었다.
사실 보고타에서 나는 한껏 날을 세웠더랬다. 치안이 좋지 않기 때문. 혹여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몸을 웅크리고 돌아다녔다. 살렌토에 온 뒤 자연스레 움츠러든 어깨가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낯선 여행지를 즐길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바쁘지 않고 그저 제 속도로 천천히 흘러갔다. 소박한 마을에서 사람과 동물들은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저마다의 방식으로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긴장을 푼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몸의 힘이 쭉- 빠져버린 것이다.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단, 살사 음악이 시작되면 거침없이 들썩이는 콜롬비아인들의 몸동작과 코 끝을 간질이며 빠르게 퍼져나가는 향긋한 커피 향만은 예외였다.
주말이 되자 조용하던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찾아온 여행객들로 활기가 넘쳤다. 살렌토는 현지인에게도 사랑받는 여행지다. 유명한 커피 원산지인 살렌토 주변 산속 곳곳에서 비밀의 커피 농장을 만날 수 있고, 동쪽의 코코라 계곡으로 가기도 좋은 곳. 주말이면 마을 광장에 여행자와 여행자를 기다리는 지프가 모두 모인다. 얌전한 마을의 주말 맞이 일탈이랄까. 안데스에 가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살렌토로 왔다. 역시나 이곳은 안데스 트래킹을 위한 최고의 시작점! 음, 좋아. 살렌토로 오기로 한 결정 아주 칭찬해~!
늦은 아침. 뒹굴뒹굴하며 게으름 피우다 지쳐, 동네 산책이나 나가려던 찰나였다. 호스텔 벽면에 붙은 문구 하나가 여유로움에 겨워 한껏 느려진 심장을 자극했다. 'KEEP HIKING, KEEP LIVING'. 전단지 내용을 재빠르게 스캔한 후 곧장 여행사로 향했다. 마을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데스 트래킹 전문 여행사가 있다. 규모는 작지만, 전문성을 갖춘 직원과 가이드가 반갑게 맞아주는 곳. 여행사 직원이 트래킹 코스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안데스 위에 도착한 지 오래.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 모든 말이 이렇게 들렸다. "KEEP HIKING, KEEP LIVING!"
트래킹에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위급사항 발생 시의 긴급 연락처를 적은 뒤 마지막으로 서명까지 마쳤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과정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새로운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의 설명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그렇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당시엔 그랬다. 여행자의 심장은 언제나 현실적인 걱정보다, 이상적인 설렘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마련이니까.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것으로 떠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안데스는 낯선 인간의 접근을 결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트래킹을 시작하면서 씩씩하게 첫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마지막 날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을 억지로 옮기던 순간까지, 어느 것 하나 쉬웠던 순간이 없었다. 안데스 특유의 산악 지형 때문이 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와 빈번히 내리는 비에 보드라운 흙길은 질척한 진흙탕이 돼버렸다. 인간의 가여운 두 다리로는 한 걸음 조차 내딛기 힘겨운 길이 한없이 이어졌다. 스틱을 꼭 쥔 채 발에 힘을 꽉 주고 걸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미끄러운 진흙탕에 맥없이 엎어지기 십상.
트래킹을 하는 내내 산속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제일 먼저 앞서있는 가이드도, 나와 투어를 함께하고 있는 커플도 이런저런수다를 나누면서 여유롭게 시작했던 초반과는 달리 각자의 눈앞에 닥친 이 험난한 난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시작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됐다. 오르고 또 올라도 끝없이 펼쳐지는 오르막길.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산등성이에 걸친 구름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앞질러 갔다. 구름이라도 타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질척거리는 땅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길. 그게 끝이 아니었다. 트래킹 중간중간 건너야만 하는 외나무다리. 아스라이 걸쳐져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였다. 강물은 발밑으로 세차게 흐르고 있었고, 나무로 덧댄 다리는 힘없이 덜컹거렸다. 다리가 중간에 툭 끊겨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어느 만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이런 망상이 들게 또 뭐람. 괜히 불안해진 마음에 진땀만 잔뜩 흘렸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 단계씩 고도를 건너뛰다 보니 고산증세가 나타났다. 가슴이 답답해져 견디기가 힘들었다. 가이드가 건네준 코카잎을 입에 한가득 털어놓고 끊임없이 곱씹어보아도 소용없었다. 폐에서 터져 나오는 쇳소리를 거칠게 내뱉으며 산을 올라야 했다. 집 앞 계단 수준의 경사에 오를 때조차도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금방이라도 가늘어진 숨이 껄떡하고 넘어갈 것만 같았다. 까마득한 산을 올려다볼 때마다 절망적인 마음만 들었다. 평지. 그때 나에겐 평평한 땅이 간절했다. 안데스에 오르기 위해 와 놓고는 평지를 그리워하다니. 분명 모순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하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통을 온전히 감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누군가 끊임없이 나를 질책하는 느낌이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안개인지 구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안데스의 숲 속. 묵묵한 침묵이 흘렀고, 숲은 더욱 깊고 고요해졌다.
적막은 불안한 마음에 한 줌 위로가 됐다. 여유를 찾고 안데스의 봉우리들을 천천히 훑었다. 차분히 보니, 이 울창한 열대우림 전체가 하나의 보물창고였다. 다양한 생명이살아가는 생태계가 잔뜩 저장되어 있는. 물기를 머금은 숲의 나무들이 저마다 진한 푸른빛을 한껏 뽐내고 있었고, 젖은 땅에서 자라는 야생 식물들은 싱그럽게 피어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희귀한 새들이 내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침묵을 깨우고 있었다. 종종 벌새(Hummingbird)가 나타나면, 가이드는 멈춰서 알려주곤 했다. 워낙 작고 빨라 그 알록달록하고 예쁜 모습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기 일쑤였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안데스도 기후변화로 인해 점점 변하고 있다는 것. 오래도록 같은 곳에 쌓여있던 눈이 녹아내리고 있고, 부분적으로 건조해지면서 생태계가 조금씩 변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어쩌면 불쑥 찾아온 인간인 나도 안데스에게는 불청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행여나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생채기를 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 섞인 생각이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지금의 깨끗하고 순수한 모습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정도. 언젠가 먼 훗날 낯선 이방인으로 다시 안데스를 찾아왔을 때도, 지금처럼 혹독하지만 조용하게 나를 맞아주었으면. 새로 생긴 소망을 품고 나는 안데스와 마주 앉아있었다.
높고 험준한 안데스의 산등성이에도 오래전부터 삶을 차려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밖에 나오지 않는 수도와 남루한 이부자리. 이방인인 내가 보기엔 곧 무너질 것같은 위태로운 삶이었다. 다만, 이곳에 삶을 차린 이들 덕분에 트래킹하며 쌓인 피로를 풀어낼 공간이 생겼다. 어쩌면 진짜 위태로운 것은 안데스에서 모든 힘을 다 쏟아내고 있는 나 자신은 아니었을까. 까만 밤이 되면 불 피워진 주방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자리를 잡고 둘러앉아 주인아저씨가 준비하신 정성스러운 음식을 양손 가득히 받아 들었다. "세뇨르, 뽀끼또 포르 파보르(아저씨, 조금만 주세요)"라고 말하니 아저씨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접시에 한가득 푸짐하게 담아 건넸다. 분명 끄덕이는 아저씨의 얼굴을 본 것 같은데 말이지.
내 접시에는 먹음직스러운 닭고기가 들어간 뜨끈한 감잣국이 담겼다. 여기에 밥을 말아 허겁지겁 삼켰다. "조금만 주세요" 라고 말한 것이 무색해졌다. 따듯한 국물이 들어가자 이내 속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굳어있던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밤하늘이 닿을 것만 같이 높은 산자락 위에서 먹은 저녁 식사. 소박하고 투박하기 그지없었지만, 내게는 그 어느 고급 식당의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안데스의 풍경은 가히 비현실적이었다. 고요한 호수 주변으로 프라일레혼(Frailejon, 남아메리카 고산지역에 서식하는 희귀식물)의 군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자니 마치 다른 행성으로 온 것만 같아 수차례 머리를 흔들어 보기도 했다. 조금 놀란 사실은 이만큼이나 올라왔는데도 지금껏 오른 것은 그저 거대한 산맥 위에 있는 수많은 산등성이 중 고작 하나였다는 것. 안데스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그저 작은 티끌에 불과하겠지. 원주민들이 낙원이라 부르는 퀸디오 산이 저 멀리 고고하게 서서 나를 굽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자연의 순수함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황홀해지면서도 동시에 경외감이 들었다. 거대한 산 위에 올랐다는 가슴 벅찬 감동과 한없이 작아지는 초라함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개의 감정이 마구 뒤섞였다. 안데스 앞에 서니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하물며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온 문제들은 흩날리는 먼지보다 더 하찮은 무엇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의 우울함과 슬픔조차도 스스로가 자초했던 것만 같았다.
안데스에 오르는 동안 차갑고 씁쓸한 공기가 끊임없이 심장을 할퀴었다. 여전히, 자연이 만들어낸 험한 길은 공포와 절망을 가져다주었다. 어지럽게 쓰러진 나무들과 허리 높이까지 움푹 팬 길과 대책 없이 내리는 비와 뿌연 안개. 그 앞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은 듯 여길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돌아보니, 어쩌면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지금 한꺼번에 걱정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강물이 흐르면 다리를 건넜고, 까마득한 오르막이 나오면 돌부리를 부여잡고 올랐다. 그러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 얼른 길을 나섰다. 순간순간 닥친 일들을 온몸으로 충실히 느끼다 보니, 어느 샌가 여기에 와있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다채로운 색감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아무리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아도 안데스의 아름다운 색채와 느낌이 그대로 담기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 순간을 카메라 대신 가슴에 담기로 했다. 먼 훗날 기억이 흐려지면서 추억으로 잘 물들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 마주한 안데스를 담아내고 또 담아냈다. 누군가 말했다. 신비주의란 일부러 입을 닫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즉, 그것은 언어적인 표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존재를 압도하는 경험'을 뜻한다고 말이다. 이 말처럼 수많은 경험 중 나를 단숨에 압도해버렸던 것은 단연코 지금, 이 순간이다.
매 순간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라
하나의 산, 하나의 별
구불거리는 강줄기
그곳에서 지혜와 인내가
너에게 찾아 오리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시드니 레베트
글│탁정민
사진│탁정민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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