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RAVEL VOL.23
유럽│박상준
대학시절 동생은 방학마다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곤 했다. 사실 여행에 그다지 관심 없던 나에게 동생의 여행은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지금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어쩌다 거대한 여행의 서사 한 가운데 서 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사실 결혼 전 아내와 나의 사이에 조건 아닌 조건이 하나 있었다. 장기 여행. 아내의 오랜 꿈이었다. 진부할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굳이 이 여행의 이유를 찾자면,
사랑이다.
폴짝- 폴짝- 몇 번이나 뛰어 올랐을까? 더 좋은 점프샷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커플을 만났다. 더 높이 뛰기 위해 온몸을 활짝 펼치는 여자와 그 모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최대한 낮은 자세로 사진을 담는 남자. 어쩌면 사랑은 기꺼이 가장 낮은 곳에서 상대방을 바라봐 주는 일. 아마 온라인에는 재미있는 인증 사진으로 남을 것이다. 짧은 시간 타임라인을 장식하다 금새 사라져 버릴게 분명하다. 다만, 두 사람에게는 가장 따듯한 배려가 담긴 사진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SNS시대의 여행자들은 인증샷을 남기는 데에 열중하곤 한다. 인증샷을 남기느라 정작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남겨진 사진보다는 사진을 찍으려는 행위 자체가 지닌 즐거움을 긍정한다. 특히 친구, 연인과 함께 보다 나은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여행을 어떤 장소에 기억을 쌓아가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면, 특별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한 노력 역시 여행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 틀림없었다.
파리 뤽상부르 공원에서의 오후를 기억한다. 화려한 건축물과 거리를 만나는 것이 점점 피곤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벤치와 잔디밭, 곳곳에 무심하게 놓여있는 의자. 사람들은 공원 여기저기 자리잡고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나른한 햇살을 즐기는 사람.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부모. 그리고 사랑의 대화를 속삭이고 있는 연인들. 공원이 가만히 차려 놓은 공간은 대부분 사랑의 행위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 중 특히 내 눈을 사로잡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진 속 커플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누구 하나 도시 한 가운데서 즐기는 잠깐의 여유를 허투루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삶의 무언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와 아내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파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2주간의 파리 여행을 마치고, 자동차를 빌려 본격적으로 프랑스 여행을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바다였다. 아내는 바다를 좋아한다. 그것이면 바다로 향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아내만큼이나 바다를 사랑하는 커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연인과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것도 로맨틱한 일이지만, 잠시 해변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파도소리는 멋진 배경음악이 된다. 이 파도와 저 파도 사이 찾아오는 잠시의 정적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쌀쌀한 바닷바람을 핑계 삼아 서로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보기도 한다.담요 하나를 두르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앉아 있노라면, 사람이, 그리고 사랑이 이렇게나 따듯하다.
자동차 여행자에게 피렌체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유난히 ZTL(Zona a traffico limitato, 이탈리아 구시가지의 안전과 보존을 위해 교통을 제한하는 구역)이 넓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도심에 가까운 주차장은 숙박비와 비슷한 수준의 주차비를 요구했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거친 운전 문화는 이래저래 헤맬 수 밖에 없는 초심자들에게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거리로 나갔다. 도시를 걷기 시작하면서 피렌체에 대한 인상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외부 차량이 제한되어 한산해진 거리와 광장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공연과 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리를 걸으며 만나는 피렌체의 석양은 어느 도시보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날. 한낮의 광장에서는 중년의 브라스밴드가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과 더위 때문인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꽤 지쳐 보였다. 녹아 내릴듯한 더위에 몸이 축 쳐지려던 찰나. 눈앞에 격렬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커플.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신이 났다. 끊임없이 낯선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여행에는 힘들고 지칠 만한 수많은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한 방울의 음악과 사랑하는 두 사람의 춤사위가 만드는 장면 하나가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피렌체의 여름은 더웠고, 사랑은 뜨거웠다. 도시의 인상화는 차갑게 시작해서, 가장 격렬하게 끓어 오르고 있었다.
여행 중 급하게 일정을 변경하여 도착한 곳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는 화려한 야경으로 유명한 도시다. 해질녘이 되면, 많은 여행자가 야경을 즐기기 위한 장소를 찾아 자리를 잡는다.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국회의사당이 잘 보이는 도나우 강 서편이나,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시타델, 어부의 요새 등이 야경을 감상하기 좋은 장소들이다. 다만, 커플들만은 야경보다 먼저 석양을 기다린다. 화려한 도시의 야경보다, 뜨거운 노을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뜨거운 입맞춤과 그 뒤에 찾아오는 어색한 미소가, 하루를 마감하며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사랑스럽다. 매일 보는 석양이 문득 벅찬 순간, 사랑하는 이의 별 것 아닌 움직임 하나에도 이토록 가슴이 설레는 시간이다.
프랑스 브루타뉴 지방의 항구도시 생말로. 도심을 에워싼 성벽이 잘 보존된 도시다. 성벽 위로 난 산책로를 따라 탁 트인 시야의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것 만으로도 세상이 모두 아름다워 보이는 곳이다. 특히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노을이야 말로 생말로 여행의 정점이다. 하늘이 불긋하게 물들기 시작하면, 하나 둘 사람들이 서쪽 성벽에 모였다가 강렬한 노을의 인상을 지나 붉은 빛이 모두 사라질 즈음 사람들도 자신이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린다.
강렬한 일몰에서 사랑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일몰 후 남아있는 잔잔한 노을에서는 이유없는 애틋함이 느껴진다. 석양의 강렬함 때문에 미처 드러나지 못했던 풍경들이 잔잔한 노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차갑게 식어가는 하늘은 사랑을 닮아있었다. 서로의 아름다움에 취해있던 시간을 지나, 이제 상대방의 약함과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로의 모든 것을 끌어 안아 가슴 속에 전에 없던 새로운 상처 하나가 나는 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불빛 하나 없는 어둔 밤에도 홀로 외로움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생말로의 하늘에 더 이상 강렬한 빛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잔잔한 노을을 즐기는 연인들이 있었다. 성벽 위 가만히 앉아 노을을 바라보는 연인들의 모습이 노을을 닮은 듯 했다.
사실 커플을 촬영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물론 촬영한 후 찾아가 사진을 보여주고, 양해를 구하지만 혹시 둘만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깨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 중 작은 포토프린터를 구입했다. 사진을 찍은 뒤, 설레는 장면을 담게 해 준 커플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 위해서다. 인화된 사진을 전달했을 때, 자신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나누는 눈빛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가슴이 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일은 곧, 그 세세한 떨림과 설렘을 나누는 일이다.
글│박상준
사진│박상준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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