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프롤로그
자, 배회는 이제 그만 두자.
밤이 이렇게 깊으니.
가슴은 여전히 사랑으로 타오르고
달은 여전히 빛날지라도.
칼이 칼집을 닳게 하듯
영혼은 가슴을 닳게 하니
가슴도 숨을 쉬려면 멈춰 야지
사랑에도 휴식이 필요하니.
바이런 <자, 배회는 이제 그만 두자> 중에서
사랑은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한다. 동시에, 인생에 가장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시처럼 칼이 칼집을 닳게 하듯 말이다. 칼에 꼭 맞는 칼집이라 해도 여기저기 베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칼집이 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상실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숱한 생채기가 날 것을 안다. 그럼에도 또 다시 사랑을 하는 이유는, 결국 사람은 사랑을 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에서 사랑을 빼내어 보라. 과연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니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인생을 알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스스로 생의 탐색가라 부르는 남자가 있다. 여행작가이자, 시인 최갑수.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주한 풍경, 사람, 도시를 통해 인생을 탐구한다. 어쩌면 탐닉한다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그런 최갑수의 모험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은 여행 중 잠시 멈춰 생각했던 사랑에 관한 단상을 모은 책이다. 지구별 여기저기서 인생을 탐닉하던 여행자는 결국, 사랑이라는 낱말 앞에 멈춰 섰다. 그도 사람이고, 사랑을 알고 또 여전히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리라.
단상 하나
여행은... 사소한 것을 발견하는 행위. 우리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는 기회죠. 그리고 사랑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고 작은 것에 깃드는 법이죠.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중에서
일상에서 작고 사소한 일을 감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좋아하는 음식점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과 전화 한 통이면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따위의 일들은 더 이상 감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여행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여행지에서 우연찮게 들어간 밥집이 맛있다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친구라도 한 명 생기면 그렇게 든든할 수 없다. 여행은 사소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일상에서 무뎌졌던 감각을 다시 곤두세우게 만드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최갑수 작가는 책을 통해 말했다. 여행은 사소한 것의 발견이고, 사랑은 그 모든 사소한 것들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그에게 여행은 곧, 지구별 곳곳에 있는 사랑의 흔적을 탐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글과 사진을 통해 여행지에서 발견한 사소한 사랑의 단상들을 전달한다. 그의 사진 속 사람들은 어쩌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일상을 살고 있다. 다만, 그 사진들이 독자에게는 여행이, 설렘이 된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보세요. 일상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리고 지금 당신의 사소한 일상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이는 지를 말이에요."
단상 둘
작가 피천득은 그의 수필집 「인연」에서 수필에 관해 이렇게 정리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않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편하게 읽히면서도, 독자의 가슴에 오래 남아서 일을 해야 한다. 넓은 세계관을 담으면서도, 정리가 되어있어야 하며, 빛나기 보단 우아해야 하 는 것. 그러니까 수필이란 참 어려운 문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행을 하고 수필을 써서 먹고 사는 여행작가는 극한 직업임에 틀림없다.
사랑을 재는 단위가 깊이라면, 문장을 측정하는 단위는 농도다. 목에 물 넘어가듯 스르르 소화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입안을 끈질기게 맴도는 끈적한 문장도 있다. 무엇이 더 좋은 문장이라고 하긴 어렵다. 술술 읽히는 문장과 가끔 시선을 탁잡아 놓는 문장이 적절하게 섞여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글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최갑수는 문장의 농도 조절에 능한 사람이다. 술술 읽어 나가다, 어느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 게 만든다. 작가 최갑수의 문장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좋은 수필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단상 셋
최갑수가 꺼내놓은 사랑에 관한 단상들이 당신에게 해답을 주진 않을 것이다. 다만, 몇가지 작은질문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는 독자에게 어른처럼 다가서지 않는다. 사랑을 모두 안다고 말하지 않으며, 사랑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미국의 작가 존 버거는 글은 빈 집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독자가 글 속으로 들어와 자유롭게 눕고, 꾸미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 했다. 작가의 생각으로 가득 찬 글에는 독자의 자리가 없다.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은 독자를 사랑에 관한 질문으로 초대하는 역할,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견해를 내고, 질문을 던진다. 최갑수의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것은, 그가 위대한 스승들처럼 혜안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질문에서 말문이 막히며,아직 깨닫지 못한 무엇인가를 향해 질문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의 모습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조금 특별한 점 을 찾자면, 이 생각들을 글로 잘 표현하는 능력이 특출난 사람이라는 것 정도다.
에필로그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드는 생각은 딱 하나다. '그래서 도대체 사랑이 뭔가요?' 한국사회에서 해답 없는 질문이란 참 난감한 것이다. 12년의 의무교육 기간 동안 정답을 외우고 맞추는 연습만 했던 탓이다. 보기라도 다섯 개 정도 주면 마음에 안정이 찾아들 텐데 말이다. 애초에 정답 없는 질문이라 그것도 어렵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세상에 흩어져 있는 수억 가지 사랑의 조각들을 모아 이리저리 맞춰보는 것이 전부다. 당장 여행을 할 수 없다면, 작가 최갑수의 다리를 빌어 세계를 여행하고, 몇가지 단상 조각들을 수집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행이든, 삶이든 그리고 사랑이든, 끊임없이 뭔가가 닥치고 그걸 해결하는 일이라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보면 계속 사랑하는 거죠. 우리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의미 같은 건 생각하지 맙시다.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중에서
글│아트래블편집부
자료제공│예담출판사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ARTRAVEL
www.artrav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