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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RAVEL Mar 27. 2018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졌습니다_1/2

ARTRAVEL VOL.25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졌습니다 

부탄 | 최갑수


ⓒ최갑수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는 그의 책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 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제프씨의 말이 맞다. 인생은 원래 물거품이다. 모든 것은 덧없고 사라진다. 허무한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당신은 내게서 멀어져가고 있고 나는 당신을 점점 잊어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조금 더, 행복하도록 하자.


ⓒ최갑수


질문의 시작


갈라파고스에서 죽음 직전의 순간을 경험한 이후, 남아공 더반에서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그리움을 경험한 이후, 나는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걸까? 그 물음을 안고 부탄으로 향했던 어느 날.


비행기 창문 너머로 흰 눈을 머리에 인 히말라야의 설산이 보였다. 태국 방콕 공항에서부터 녹초가 된 몸은 아침 해를 받아 명징하게 빛나는 설산을 바라보며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생수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당신의 이름을 살짝 불러보았다. 당신은 오래 전부터 내가 만나고 싶었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창에 입김을 불며 당신의 이름을 썼다가 지웠다. 당신 이름이 지워진 자리, 창문 너머 어떤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듯 유리창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당신을 향한 마음이 들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파로(Paro) 국제공항에 내려 심호흡을 크게 했다. 히말라야에 고여있던 맑은 공기가 가슴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부탄 전통옷을 입은 남자들이 보였다. 공항에 근무하는 공무원인 것 같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근 눈동자, 오똑한 콧날을 가지고 있었다. 깨끗한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먼저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여행자들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매너다.


공항에서 수도 팀푸(Thimphu)로 가는 길, 비포장 도로는 아찔한 협곡 사이를 지난다. 실수하면 아득한 벼랑 아래로 차는 굴러 떨어질 것이다. 가이드는 부탄의 길이 대부분 이렇다고 설명한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버스는 산등성이를 힘겹게 오른다. 부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와 가축을 기를 수 있는 초지는 국토의 10%가 채 되지 않는다. 국토의 대부분은 비탈과 협곡이다. 부탄 사람들의 삶은 가파른 비탈에 기대고 있다. 이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행복지수 세계 1위. 국민의 97%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나라. 방콕에서 부탄행 둑 에어(Druk Air) 오르며 품었던 이 의문은 부탄을 여행하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최갑수

ⓒ최갑수

부탄은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4분의 1, 인구라고 해봐야 75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히말라야 동쪽에 숨은 듯 자리한 이 나라는 자유여행을 허가하지 않고 하루에 200-250달러 환경세 개념의 여행경비를 내야 하는 패키지 투어만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베테랑 여행자들 가운데서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 부탄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입국한 외국인 수는 약 20만 명, 이 가운데 한국인 여행객은 1,000여 명 정도라고 한다.


부탄의 첫 감흥은 동남아의 여느 중소도시에서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행의 첫 목적지는 수도 팀푸. 수도라고 해봐야 인구 10만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는 긴 협곡을 따라 들어서 있다.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고, 부탄 전통복장인 '고'와 '키라'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붉은 옷을 입은 승려들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느라 바쁘다. 길가 조그만 구멍가게에서는 코카콜라를 잔뜩 쌓아놓고 판다. 겉모습만 봐서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들은 왜 행복할까.


여러 지표상으로 부탄은 가난한 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이 2,800달러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 이틀만 부탄을 겪어보면 이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 상태마저도 엉망이지만 서두르는 법 없는 부탄 사람들은 도로 사정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쁜 도로 사정을 탓하는 건 오직 관광객들뿐이다. 히말라야에서 쏟아져 내린 풍부한 수력으로 전기를 만들어 인도에 팔고 그 돈으로 모든 공산품을 수입해서 쓴다. 그러니 미세먼지나 공해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관광산업에서 얻는 수익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는 재원이 된다. 여행하는 외국인들도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1999년 부탄의 국가 행복지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행복을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탄 행복연구소' 도지펜졸 소장은 "부탄은 국민의 행복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고 국가를 운영한다"고 말했다. 어떤 정책도 '국민 행복'과 부합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정책은 10-15명으로 구성된 '국민총행복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총점 78점을 얻지 못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 헌법에 숲 면적을 국토 면적의 60% 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나라가 부탄이다. 4대 국왕 직메싱계왕축(1955-)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의회민주주의로 이양을 선택했다. 그 결과 2008년 총선이 실시돼 지금은 총리가 수반이 돼 부탄을 통치하고 있다. 하루 7시간 노동도 철저히 지켜진다.


자, 우리나라와 부탄 중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최갑수
ⓒ최갑수


부탄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사흘을 보내는 동안, 이들의 미소 때문이었을까 마음 한 켠에는 어떤 잔잔한 일렁임 같은 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거리에 울려 퍼지는 새벽 타종 소리와 함께 눈을 떴을 때, 숙소 밖으로 몰려든 자욱한 우윳빛 안개를 보며 내 속에 무언가가 조금씩 채워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도하곤 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잃어버렸던 어떤 음악을 비로소 찾아 듣게 됐을 때와 비슷한 감정 같기도 했고 손에 따뜻한 조약돌 하나를 꼭 쥐고 서 있는 듯한 기분 같기도 했다. 서서히 마음이 돋아나던 시간들. 우리 몸을 순환하는 피의 온도를 느낄 수 있던 시간들.


그 아침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만약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아니다'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함정과 덫을 피해 겨우 여기에 다다랐는가. 이제서야 당신 앞에 섰다. 나는 알고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뺨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되기까지 내가 잃었던 많은 사랑들. 그 어리석은 일들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산등성에서 밀려오는 아침 안개를 바라보며 나는 따뜻한 밀크티를 마셨고,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의 얼굴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나는 겨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글│최갑수

사진│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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