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뭐로 밥 먹고 살아요, 라고 묻는 질문에 한결같이 대답하는 내 직업은 '호기심 많은 문화기획가'이다. 한국표준직업분류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직업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문화기획가'로서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현장을 지키며 이끌어가고 있다. 내 일생을 통틀어 가장 심장이 뛰는 일이다. 그렇지만 의미지향형 인간으로 살다보니 심각하게 나이 먹도록 돈은 따르지 않고, 근근히 죽지 않을 정도로 벌어 겨울을 나고 또 제로에서 봄을 시작하는 반복인데, 긍정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뭐랄까, '베짱이형 개미'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하루살이 문화기획가임에는 틀림없다. 아, 올해부터는 돈을 좀 벌어서 연금도 마련해야겠다. 나이도 나이고 올드미스가 아니라 골드미스는 되어야하는 시대니까.
사실상 코로나19로 인하여 문화예술계는 초토화되었다.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안타까운 사연도 상당하다. 나또한 올해는 일년을 공치고 괴로움 속에 있을 줄 알았는데,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개인적으론 일복이 엄청나게 터져서 정말 죽을 뻔 했다. 하루에 한 두시간을 쪽잠으로 자며 수개월을 버틸 정도였으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 감사했지만 한꺼번에 일이 몰리면서 잃어버린 일과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의 불가피한 상처도 생겼지만 늦은 나이에 시작해 이 바닥 18년차다 보니 나를 신뢰하거나 신뢰할 수 있겠다 하는 사람들은 곁에 남아주었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애써 위로했다.
그렇게 전쟁같은 반년을 보내고, 일상의 평화를 되찾은 요즘은 문자는 커녕 전화벨도 안 울린다. 이런 비자발적 평화를 고맙다고 해야하나, 좋다고 해야하나 싶을 때 뭔가라도 해야겠다 싶어 봄에 하던 짓을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바로 요리다.
사실 나는 십여년 전부터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 밖에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그게 뭐든 먹었다 하면 바로 화장실로 직행이다 보니, 누가 뭐를 먹자고 하는 게 무섭고 괴로웠다. 진땀이 나고,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특히나 음식을 먹은 후 자동차를 타는 일은 무조건 피했다.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닥쳐오는 그 상황은 하늘이 노래지고 그야말로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해서 어떻게든 문제를 파악해 고쳐보려고 위에서 아래까지 연계된 모든 소화기관을 검사하고도 이것저것 좋다는 짓은 많이 해봤는데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찬란하게 피어난 예술은 고통의 기억과 기반위에서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나는 뭐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은 커녕 맘 편히 얘기하기에도 확실히 미담은 아니었다. 종일 굶거나 겨우 두유 하나로 허기를 달래기 일쑤였고, 집에 돌아온 늦은 저녁에나 허겁지겁 밥을 먹다보니 다이어트는 꿈도 꾸지 못했다. 무언가를 먹으면 곧장 화장실행, 먹지 않으면 아우성치는 꼬르륵 소리... 예배당, 도서관, 영화관 같이 조용한 곳은 가지도 못하겠고, 조용한 미팅은 생각만으로도 싫었다. 출장이 1박2일이든 2박3일이든 차라리 굶어버렸으니 아... 정말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런 내가 요리를 한다?!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뒀냐 물어오던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나는 건 그땐 틀렸고, 지금은 맞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암직 먹음직한 음식들이 내 손끝에서 탄생하고, 그걸 맛볼 수 있다는 소확행에 매일이 즐겁다. 이게 좋네 저게 좋네 떠도는 수많은 레시피들을 섞어 요리를 하며 나만의 입맛도 찾고, 맛있는 조합도 찾아내고 있다. 그뿐아니라 식기와 플레이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각적으로 예쁜 요리가 맛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경이 이왕이면 예쁜 혼밥을 만들어보리라 생각했다.
사실 플레이팅은 '광주세계김치축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분을 비롯한 김치장인들의 김치시연 영상작업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인데, 푸드스타일링이 아름다울수록 맛있는 한끼가 선물처럼 내게 주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손은 간다, 그것도 많이 간다. 그렇지만 하다보면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귀차니즘은 점진적으로 극복하게 된다. 내 앞에 근사한 요리가 나타나는 기쁨을 더 이상 뿌리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밖에서 먹을 수 없던 안타까움을 모아 이런저런 요리실험을 시작한게 코로나19 덕분이기도 하다. 아마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요리사로 만들었을 거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한 해의 활동이 모두 끝나 문화예술계 비수기이고, 봄을 준비하는 시간인 줄 알면서도 같은 업종의 사람들조차 습관처럼 해오는 질문이 저거다. 그러면 난 대답한다. 요즘은 요리하는 문화기획가로 지내요, 라고. 코로나시대 집에 머물다 보니 할 수 있는 일들의 한계가 있고, 그 중에서도 손으로 하는 소소한 취미를 즐기다 보니 시작하게 된 '코로나시대 요리'가 봄에서 겨울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봄밥상은 대체적으로 늘 해먹던 것들을 무난하고 단정하게 정리해준 정도였지만, 겨울밥상은 뭔가 새로운 시도들이 가득했다. 국적불명의 요리들도 많았다. 여행을 못 떠난 대신 적정한 값의 가성비 식기들과 스타일링할 제품들을 사들였고,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마추어치고는 훌륭한 식탁으로 변신을 거듭해왔다. 혼밥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언젠가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요리들을 나눌 수 있겠지 싶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열심이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요리하는 문화기획가로 좀 더 비중있게 살아갈 것 같다. (물론 나는 일을 더 잘한다. ^^;)
날마다 해온 수많은 요리 중, brunch에 처음으로 올려보는 요리는 '연어샐러드리스'와 포르투갈의 문어요리 중 하나인 '세비체'이다. 연어샐러드리스는 유튜버 '브롱부부잘먹고잘살기'를 세비체는 '햇살한스푼'을 참고한 건데, 따라하되 가감하며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갔다. 집이라는 공간에 모든 식재료가 있을리 만무하고, 하다보면 내 입맛과 다를 수도 있으니까. 요리는 보는 것과 맛이 다르다.
연어샐러드리스는 원하는 재료들을 잘 플레이팅해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곁들일 소스는 올리브유, 간장, 식초, 올리고당과 깨, 다진 마늘/양파가 조화를 이룬 오리엔탈드레싱도 괜찮았는데, 생각해보니 포르투갈의 문어요리 중 하나인 '세비체'에 곁들였던 소스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새콤달콤한 요리의 베이스는 비슷비슷하니까. 세비체 소스는 올리브유 8큰술, 레몬즙 3큰술, 화이와인비네거(대신 식초 2큰술), 소금, 후추, 유자청(대신 귤청 2큰술)과 올리고당 등으로 입맛에 따라 가감해주었다.
연어샐러드리스 플레이팅에 사용한 식기는 흰색의 도자기 굽접시다. 차가움은 유지해주되 은은하게 비슷한 컬러로 요리가 돋보이는 무광의 원형으로 잘 어울린다. 소스볼도 도자기이고 꽃모양이지만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다. 원하는 식기를 다 사려면 엄청난 돈을 벌어야 할 거다. ^^; 그리고 세비체는 낮은 플레이트 대신 높이가 있는 도자기로 만든 디저트볼 식기에 담아보았다. 샐러드형 문어요리인데다 방울토마토, 이탈리안 파슬리, 파프리카 등 컬러가 명확하게 대비되는 블랙이라 요리가 산다.
사랑처럼 요리에도 국경은 없다. 그리고 사람의 수만큼 입맛도 다양하다. 그러니 이게 꼭 맞는 건가 생각하기보다 내 입에 맞게 가감하는 훈련은 늘 필요하다. 그렇게 타르타르소를 곁들인 연어스테이크와 더불어 오늘도 맛있는 한끼가 탄생했다.
요리는 시간이 좀 걸리고, 또 수많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 맛이 정직하기 때문이다. 코로나시대라 외출이 어려워 어쩌다 시작한 거지만 요리의 즐거움과 요리를 하며 드는 소소한 생각들이 많아졌다. 이걸 기반으로 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꽃같은 연어샐러드리스를 첫 글밥으로 올려본건, 지독하게 힘들었던 2020년을 잘 보내고, 새로 시작된 2021년이 언제나 꽃같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늘 꽃길 같을 수야 없겠지만 나도 당신들의 삶에도 꽃길이 피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되어. 그와 더불어 마음에 품어왔던 켈트족의 기도문 하나를 적어본다. 이 글귀도 당신들의 삶에 등불이 되어주기를 소망하며.
"바람은 언제나 당신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