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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진 Jun 25. 2020

날아볼까 그려볼까ㆍ이브 클랭

Yves Klein

19살 때 니스 해변에 누워 상상했다. 하늘로 공중 부양하는 자신의 모습. 자신은 초 자연적인 슈퍼파워를 가졌다고 믿었다. 이브 클라인 부모님은 모두 화가였다. 아들에게 학교 미술 과정을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프랑스 니스 해안가 푸른 바다와 자유를 느끼며 자랐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53년 그는 도쿄로 날아갔다. 15개월을 머물며 유도를 배운다. 24세 이 프랑스 청년은 4단 검은 띠까지 땄다. 이 시기 일본에서 불교를 처음 접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공, 무(無) 개념을 처음 접했다. Void 개념을 <Leap into the Void> 작품 속으로 가져왔다. 그는 비 물질성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예술 작업은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Yves Klein, Leap into the Void, 1960, Photo:Harry Shunk, János Kender

유년기 상상하던 꿈을 실행에 옮겼다. 1960년 10월 아침 세탁해 둔 검은 양복을 입었다. 아트 딜러 집으로 갔다. 클라인 부인과 친구들이 함께 모였다. 클라인은 2층 지붕으로 올라갔다. 몸을 던졌다. 길에서 친구들이 방수포를 들고 있었다. 몸을 던지고 또 던졌다. 허공에서 몸 곡선이 자신이 생각하는 포즈로 나와야 했다. 사진작가 해리 슝크 Harry Shunk와 존 켄더John Kender가 사진 찍었다. 이후 암실에서 사진을 잘라내고, 접착, 재배열, 겹치는 과정을 거쳤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 이미지가 탄생했다.

Yves Klein, Leap into the Void, 1960, Photo:Harry Shunk, János Kender

한 달 뒤, 사진은 파리 아침 신문에 실렸다. 2층에서 몸 던지는 모습이었다. 헤드라인은 '공간 속의 남자'였다. 사진은 두 가지 버전이 실렸다. 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뒷모습이 보이는 것과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합성 사진을 진짜로 믿었다. 그가 진짜 뛰어내렸는지 궁금해했다.

Yves Klein, Leap into the Void, 1960, Photo:Harry Shunk, János Kender

허공 위로 상승해 날아오를 것인가. 아래로 떨어질 것인가. 보는 이의 해석에 달렸다. 사진 속 순간만큼은 그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클라인은 자신을 얼어붙어 영원한 존재가 되게 했다. 나도 날아볼까. 생각이 들었다가도 사진을 보며 떨어지면 다칠 텐데 걱정이 앞선다. 예술은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 중력의 법칙과 질서가 들어맞지 않는 순간. 그것을 끄집어내서 표현한다. 클라인은 삶과 죽음 경계에서 허공에 몸을 날렸다. 그 긴박한 순간, 자전거를 탄 한 남자가 매일 이 길을 지나가는 듯 무심한 등을 보이며 사라지고 있다.


클라인은 유도를 하다 보았다. 매트 위에 몸이 떨어진 순간, 몸이 만들어낸 눌린 자국들. 아! 몸으로 자국을 만들자. 붓으로 인체를 그리지 말고, 진짜 몸으로 몸을 그려보자. 살아있는 붓이 될 수도 있지. 먼저 자신의 아파트에서 로트라우트 Rotraut 몸에 페인트를 묻혀 종이에 찍는 작업을 했다. 로트라우트는 재미있는 작업이었다고 회상한다. 내 몸이 그림이 되는 게 신기했고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Yves Klein, Untitled Anthropometry, 1960, Photo:snippetofhistory.wordpress.com


이후 이브 클라인은 1960년 2월 파리 한 아파트에서 공연했다. 일곱 명의 클래식 연주자들을 불렀다. 관객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클라인이 연주자들에게 연주를 지시하자 <모노톤 침묵 심포니 Symphonie Monoton Silence>를 시작했다. 이 곡은 그가 작곡했다. 한 코드만 20분 연주되고 이후 20분은 침묵한다. 연주하는 동안 누드모델 세 명이 등장했다. 클라인의 사인을 받고 옷을 벗었다. 온몸에 파란 페인트를 칠했다. 벽에 걸린 종이에 몸을 찍었다.


Yves Klein, Untitled Anthropometry, 1960, Photo Harry Shunk, Janos Kender J.Paul  Getty Trust

인체는 생략되었다. 추상화처럼 몸통, 허벅지가 단순하게 찍혔다. 가장 집중된 생명 에너지의 표현이라 불렀다. 인간 존재 안에서 가지는 건강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몸이 살아 있는 몸이 되는 것. 그것은 새로운 회화의 언어였다. 주체와 오브제, 매개체의 역할은 뒤 섞인다. 예술가가 꼭 캔버스 위에서 작업해야 하는가? 회화는 계획하고 드로잉을 먼저 연습해야 하는가? 몸의 흔적을 찍어낸다. 몸은 살아있는 붓이 되었다. 그림 도구가 된 인체. 클라인은 새로운 문을 열었다.

Yves Klein, Untitled Anthropometry 1960, dry pigment, synthetic resin on paper mounted on canvas 144.8 x 299.5 cm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Smithsoniam Institution, Washington, DC


인체를 찍은 푸른색 International Klein Blue IKB는 그의 대표적인 모노크롬 회화였다. 1954년부터 알제리에서 프랑스와 전쟁이 있었다. 알제리는 치열하게 싸워 1962년 독립이 이루어진다. 1958년 드골이 복귀하면서 혼란에 대해 클라인은 "오늘날 프랑스 모든 시민들은 더 이상 전설적인 국가가 아닌, 타락하고 있는 국가의 일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외부적 확신에도 불구하고 내심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다."라며 자신의 원고와 서신에서 프랑스 혼란에 대해 비판한다. 자신을 '푸른 혁명'이라 불렀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책이 있어야 한다며 생각을 담은 책을 출판했다. 몸으로만 말한 것이 아닌 수많은 글로도 말했다.

Yves Klein, Untitled Anthropometry 1960, dry pigment, synthetic resin on paper mounted on canvas 144.8 x 299.5 cm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Smithsoniam Institution, Washington, DC


클랭이 인체 측정학을 공연할 당시 유럽과 미국은 추상표현주의가 유행했다. 1960년 4월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누보 레알 리스트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누보 레알리즘이 시작되었다. 이브 클라인과 팅켈리, 빌레글레, 레스타니, 아르망 등이 함께 했다. 예술가들은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 했다. 그의 작업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Yves Klein, Anthropometrie sans titre(ANT49) 1960 108.9x65cm ⓒChristies

1962년 34세 세상을 떠나기 전 7년간 보여준 비물질적인 작업들은 예술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눈을 감기 전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를 가질 거야. 그곳은 아주 강렬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이 되겠지." 가시적인 것을 표현하고 본다는 예술 작품. 비 가시적인 것.


보이지 않는 허공이 예술이 되면 어때? 그는 질문을 던진다. 허공도 예술이야. 빈 방도 예술이야. 움직이는 제스처 조차도 예술이 될 수 있지. 상상을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짧았던 삶이었지만,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표현했다. 사진과 영상 속 그의 눈빛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과 자유분방함 묻어난다.





참고문헌

Klaus Ottmann, 'Introduction' in Overcoming the Problematics of Art: The Writings of Yves Klein, pp.17-18

Christie's What Inspired Yves Klein?, 20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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