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아버지는 저널리스트였고 어머니는 페루 귀족 가문 출신 딸이었다. 외할머니는 스페인 무적함대 대령 마리아노 모소코소와 프랑스 여인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고갱 <자화상> 1893 캔버스에 유화 45x38cm 오르세 미술관
고갱이 1살 때, 아버지의 정치적 기고문 때문에 가족들은 프랑스에서 추방당해 페루 Peru로 간다. 페루로 가는 배에서 아버지는 사망한다. 어머니와 고갱은 리마 Lima에서 4년을 머물다 프랑스로 돌아왔다.
7살 고갱은 프랑스 기숙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17살 프랑스 수습 선원으로 상선을 탄다. 19살 해군에 입대해 '제롬 나폴레옹'호에 승선한다.
19살 항해하던 배 위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파리에 살고 있던, 스페인계 유대인, 구스타브 아로자 Gustave Arosa 아래 지내게 된다. 아로자의 추천으로 환전소에 취직해 11년간 일하게 된다. 아로자는 구스타프 코로, 들라크루아, 밀레 등 다양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 고갱은 많은 예술작품을 접하며 취미로 습작을 시작한다.
"자연에서 보는 것,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것, 모두 빼놓고 싶지 않아"
1887년 39세였던 고갱은 프랑스를 떠나 파나마 Panama를 항해한다. 화가 친구 샤를 라발 Charles Laval도 함께 했다. 고갱은 파나마 운하 건설 Panama Canal 현장에서 일한 지 2주 만에 해고당했다. 이 후 마르티니크 Marinique로 떠난다.
마르티니크는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 영토 섬 중 하나였다. 마르티니크에서 본 것들은 훗날 <브리트니> 그림에 영감을 주는 독창적인 자양분이 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머무는 아를 Arles로 출발하기 전 고갱은 고흐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와 함께 서로의 그림도 동봉해 보냈다. 이 자화상은 편지와 함께 고흐가 받은 그림이다.
빅토르 휴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속 주인공 장발장의 옆모습이 벽에 걸려있다. 엄숙한 듯 무거운 표정. 곱슬머리. 피곤한 듯한 눈빛. 장발장의 얼굴과 고갱의 얼굴이 닮아 있다.
고흐는 고갱의 초상화를 받아보고 대담한 색체에 감동을 받았다. 주황색의 벽. 초록색의 장발장 포스터. 이에 비해 고갱의 얼굴은 어두운 색이다.
고갱 <자화상, 레미제라블> 1888년, 캔버스에 유화, 45x55cm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고갱은 고흐의 아를 Arles 집에 함께 머물렀었다. 두 사람의 동거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불행으로 끝났다. 각자 색의 사용, 붓의 놀림, 비 전통적인 주제 선택 때문에 두 사람은 후기 인상파 Post-Impressionist라고 분류된다. 둘의 거친 기법도 원시적인 분위기에 가깝다.
입체감 없는 평면
고흐를 뒤로하고 고갱은 파리로 돌아왔다. 고갱은 더 이상 인상주의 기법에 관심이 없었다. 평평한 표현, 색면 구성에 관심이 있었다.
파리를 떠나 처음으로 간 곳은 브리타니 Brittany였다. 상상력과 현실을 한 화폭에 담은 작품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 천사와 싸우고 있는 장면은 1500년 경부터 오랫동안 화가들이 다른 주제였다.
고갱 <설교 뒤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 캔버스에 유화, 74.4x93.1cm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 영국
이 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앞부분은 전통 브리타니 복장을 한 여성들이 미사를 보고 있다. 뒷부분은 야곱과 천사가 싸움을 하고 있다.
노란 날개를 한 천사와 검은 옷을 입은 야곱이다. 여인들이 입은 옷 역시 검은 옷이다. 검은색은 사탄 죄를 의미한다. 야곱은 천사를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느님의 신앙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야곱의 의지이다.
이 장면은 입체감이나 명암이 없다. 대신 색과 선이 보인다. 평면적인 색채로 단순화했다. 굵은 윤곽선은 단순함을 강조한다. 최소한의 선 안에 종교적 믿음과 영혼을 불어넣었다. 비 대칭적 균형과 순수한 색의 처리법이 눈에 띈다.
<설교 뒤의 환상> 작품 이후로 고갱의 화풍은 완전히 바뀐다.
브리타니의 가을 수확철, 짙은 갈색 십자가 위 노란색 그리스도가 있다. 강렬한 노란색과 직선에 가까운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캔버스의 전면은 굵고 대담한 십자가가 차지한다. 이들 직선과 대비되는 곡선은여성들이다. 들판은 초록과 노란색, 붉은 나무가 섞여있다. 사실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감정적인 표현을 담았다.
"인상주의 화가는 색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지. 하지만 그들에게 이상적인 풍경화는 존재하지 않아. 오직 눈에 비친 색만 집중하지. 생각의 중심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색을 간과해." - 고갱 -
고갱 <노란색의 그리스도> 1889 캔버스에 유화 91.1x73.4cm Albright-Knox Art Gallery
고갱은 촌스러움을 훌륭하게 담고 싶었다. 미신적인 단순함이 보이도록 하고 싶었다. 단순화한 구조, 평평한 공간, 좁은 윤곽선, 밝은 색. 이 방법들이 종교적 믿음을 직접적이면서 상징성을 담는 시각적 표현일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십자가는 근처에 있는 Tremalo 교회에 17세기 나무 십자가와 그 형태가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 브리타니의 농부는 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면 무릎 꿇고 기도문을 암송했다.
이들에게 가을 수확철은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삶, 부활의 순환과도 같은 깊은 정신적인 의미였다. 농부의 소박한 삶과 단순한 일상생활에 고갱은 빠져들었다.
브리타니에서 고갱의 종합주의 Synthetisme 작품들이 완성된다. 그중 <노란 그리스도>는 종합주의 형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사물, 인체를 종합적, 상징적으로 해석해 인간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상상력과 기억의 작업이었다. 평면 칠하기, 색으로 면을 구성하기, 색으로 감정 표현하기, 굵은 윤곽선, 평면성을 강조한 종합주의는 훗날 야수파와 표현주의에 영향을 준다.
고갱은 생각과 감정을 화폭에 구성적 요소들로 표현했다. 이 기법은 Pont-Aven 스쿨의 기법이다. 전체적 구성과 하모니를 통해 특별한 감정을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대상을 단순화하는 방식인 데포르마시옹 deformation은 대상을 변형, 과장, 왜곡시켜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는 기법이었다. 세잔이 먼저 시작한 데포르마시옹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타히티에서
우울증을 겪은 고갱은 43세에 프랑스를 떠나 타히티 Tahiti로 향한다. 프랑스 정부에서 소개장을 받아 '타히티 관습과 풍경을 연구하는 임무'라는 이름 아래 떠났다.
1891년 6월 8일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 Papeete에 짧게 머물렀다. 파페에테에 도착하자 흑인 총독은 고갱을 프랑스에서 온 중요한 사람으로 환대한다. 고갱은 파페에테가 유럽 같아서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유럽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유럽을 모방한 지역이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라고 [노아 노아]에 기록했다.
고갱이 남태평양으로 간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유럽 문화 발전과 도시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인 삶을 원했다. 유럽 회화 스타일을 버리기 위해서 남태평양으로 갔다. 외가 쪽 핏줄인 남미의 본능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이끌렸다. 파리에서 주목을 더 못 끌자, 오리엔탈리즘적 작품으로 파리에서 더 유명해 지기 위해서 갔다. 파리에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왼)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무엇일까? 어디로 갈 것인가?> 1897-1898 캔버스에 유화, 139x375cm 보스턴 미술관 (오)세잔 <대수욕도>1898-1905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인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가 탄생한다. 시인 말라르메는 이 작품을 보고 '대본 없는 음악적인 시'와 같다고 했다.
오른쪽 세 명 여인이 보인다. 오른쪽 앉아 있는 여성은 손을 턱에 괴고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 여인들 사이 아기는 생명의 시작을 말한다. 가운데 서 있는 젊은이는 과일을 따고 있다. 젊은 시절 무엇인가를 원하며 살아가는 일상을 나타낸다. 청년은 과일을 따서 어린 소녀에게 주었다. 어린 소녀가 청년 옆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다. 캔버스 왼편에는 백발노인이 머리를 감싸고 있다. 마지막으로 늙은 여성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 앞에 도마뱀을 밟고 선 흰 새가 있다. 허무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작품을 완성하고 1898년 파리 Ambroise갤러리에서 전시할 때 세잔과 마티즈도 파리에 있었다. 마티즈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예술가의 길을 시작했고, 세잔은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화 Portrait of Ambroise Vollard>를 그리고 있었다. 세잔과 마티즈가 고갱의 그림을 보러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후 세잔과 마티즈의 그림에 고갱이 화법이 보인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피카소 속 고갱
(왼) 피카소 <자화상> 1906 (오) 고갱 <자화상> 1893
1901년 피카소가 예술가 길에 접어들었을 시기, 파코 뒤리오 Francesco (Paco) Durrio는 고갱의 세라믹 작품을 피카소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년 후 1903년 고갱은 타히티에서 사망했다.
파코 뒤리오는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도예가였다. 뒤리오는 1886년부터 고갱과 예술적 동료였다. 파리에서 작업실을 함께 쓸 만큼 가까웠다. 고갱이 타히티에 뒤리오를 초대하기도 했다. 고갱이 사망한 이후 뒤리오는 고갱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고갱 회고전을 위해 스페인과 파리 전시에 뒤리오가 고갱의 작품을 빌려줄 정도였다.
피카소는 뒤리오를 통해서 고갱의 조각과 회화 작품을 접했을 것이다. 1907년까지 피카소 초기 작품들은 고갱처럼 목제, 도자기, 캔버스에 유화 같은 방식으로 작업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에는 고갱의 그림 속 포즈와 의상들이 나온다.
(왼) 고갱 <삶과 죽음 la vie et la mort> 1889 (오) 피카소 <삶 la vie> 1903
오른쪽은 고갱. 왼쪽은 피카소의 작품이다. 피카소는 친구가 죽고 나서 그 슬픔을 담았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갈 것인가?>처럼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 애통함, 비통한 감정을 담았다. 삶은 캔버스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한다. 왼쪽은 젊은 여인, 오른쪽은 죽음에 가까운 여인이다. 피카소 역시 오른쪽에 삶을 시작하는 아기로부터 왼쪽 젊은 남녀 그리고 뒤쪽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 모습을 담았다.
고갱의 '주변 시야' 관점으로 인체를 그리는 방법도 피카소 초기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피카소가 아프리카 마스크 조각을 많이 만들었던 도전 역시 고갱이 원시미술에 대한 관심과 작품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고갱이 오래 살아서 피카소와 긴 시간 교류가 있었다면, 피카소의 작품이 어떻게 완성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참고문헌
www.gauguingallery.com
[노아 노아 No'ano'a ] 지은이 폴 고갱/ 정진국 옮김/ 미디어 글씨 출판사
[Paul Gauguin The Mysterious Centre of Thought] Dario Gamboni
[Gauguin and Impressionsim] Richard R. Brettell and Anne Birgitte Fons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