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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바다

by 한찬희

우리는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수면 가까이에서 가볍게 떠다니고, 누군가는 중간쯤에서 방향 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누군가는 깊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죠.

단순히 연봉이나 학벌 같은 외적인 기준으로 높낮이가 정해지지 않는 이 바다는 마음의 바다입니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면 수면 가까이에서 유영하고, 불안과 무력감이 쌓이면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되죠.

수면 가까이는 꽤 평온합니다. 숨 쉬는 것이 자연스럽고, 햇빛이 들어와 항상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죠. 가끔 물살이 흔들리지만 괜찮습니다. 어지간한 일로는 휘청이지 않으니까요. 가장 평안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중간 수심은 조금 애매합니다. 흘러가긴 하는데 딱히 목적은 없죠. 크게 힘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평온하지도 않은 상태. 감정이 묘하게 무뎌지고 뭔가 잡히지 않는 기분. 생각은 많은데 어느 하나 마음에 닿지 않습니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감정이 무겁게 달라붙기 시작합니다. 외로움, 불안, 자기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물처럼 스며들어 몸을 움직이기가 점점 어려워지죠. 수압이 높아진 탓일까요? 숨이 차고, 말이 줄고, 눈앞이 흐릿해집니다. 어찌어찌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충분히 가라앉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끝에는 또 다른 곳이 존재합니다. 생각이 멈추고, 울음도 사라지고,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조차 남아있지 않죠. 조용히 가라앉는 자리, '바닥'입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느껴지는 자리. 움직일 기력도 없고 숨조차 무겁게 내려앉는 곳. 무너짐의 상징.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요. 힘을 낼 필요도 없고 멈춰있어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어요. 모두가 나를 포기했기에 기대도 없고 실망도 없죠.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하며 살아왔어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일하고 공부하며 바쁘게 살아야만 했죠. 왜 그랬을까요? 열심히 사는 게 당연한 사회여서일까요?

어쩌면 바닥은 쉼터였는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곳. 외롭긴 하겠지만 가장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곳. 처음엔 무기력했지만 점점 편해졌어요.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것 같은 고요함. 바닥은 그런 곳이더군요. 잊혀지는 대신 쉬어갈 수 있는 곳.

결국 바닥을 딛고 다시 떠오릅니다. 수면 가까이로 올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햇빛이 따뜻하다는 걸 느끼게 되죠. 바닥을 밟아본 사람은 압니다. 그곳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조용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었는지를.

그 경험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예전엔 쉽게 흔들렸던 감정이 이젠 어지간해서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자신의 바닥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 그 사람은 수면 가까이에서도 안정적으로 유영할 수 있게 됩니다.

바닥에 머문다는 건 끝이 아니라 시작을 준비하는 가장 느린 방식일 수 있어요. 무너지지 않았다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들을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거든요.

어쩌면 우리는 높이 떠오르기 위해 바닥까지 내려갔던 게 아닐까요?


작가의 주저리주저리

오랜만에 저의 경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그저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글을 썼습니다. 영감을 받은 건 한 웹툰의 대사.

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뭘 딛고 높게 뛰어오르겠단 거냐

'바닥'이라는 단어에 꽂혀 한참을 생각해봤습니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들이 마치 물 속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처음에는 사회적 위치, 성공 같은 외적인 부분으로 나누려 했어요. 수면과 가까운 곳은 성공한 사람들, 바닥에 가까운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

뭔가 확 와닿지 않더군요.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웹툰의 저 대사는 더욱 심오한 것이었을 텐데.

그래서 '마음의 바다'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았습니다.정신력이 강할수록 높이 있고, 낮을수록 아래로 내려가는, 뭐 그런 간단한 설정이죠.

가장 중요한 건 바닥을 딛고 올라선다는 내용이 주를 이뤄야 한다는 건데, 바닥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죠. 그곳은 굉장히 외롭지 않을까? 조용하지 않을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글이기에 설득력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바닥에 떨어져도 언젠가 다시 올라올 수 있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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