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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 세대에서 MZ세대로

소설 서른의 반격

by 조우주

‘득도(사토리) 세대’라는 말이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구직난이 아니라 구인난이 심각한데도 그곳의 청년들은 취업과 승진, 심지어 연애와 결혼, 식사에도 관심이 없다. 이 ‘득도 세대’라 불리는 청년세대가 행복지수가 높다는 결과는 좌절이 오래되면 체념을 하게 되고 좋은 일이 생겨도 동요가 크지 않는 데서 오는 기묘한 안정감에서 온다고 도쿄대의 한 사회학 연구에서 밝혀졌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갖지 않는 현상은 한국의 ‘N포 세대’가 그 전철을 밟고 ‘MZ세대’로 이어진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사회에 의하여 거세된 것이다.



1988년생.



1988년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올림픽에 대한 단상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초반부만 읽다 보면 ‘88만 원’ 세대에 대해 다루는 르포 느낌이 든다. 나이로는 ‘밀레니얼’ 세대이자 경제학적으로는 ‘88만 원’ 세대에 속하는 30세 여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동질감을 유도하기 위해 자신을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고 일부러 자칭해야 하는 것이 아닌, 누가 봐도 ‘보통사람’인 주인공 김지혜는 디아망 아카데미의 인턴이다. 그녀는 문화산업부문의 대기업으로 알려져 있는 DM그룹의 본사 정직원 채용에 여러 번 낙방하고 그 산하의 문화센터인 디아망에 들어간 것이었다. 다른 기업체에 지원해보기도 하지만 언제쯤 비정규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는 유명 인문학 강사인 박 교수처럼 하나같이 텅 빈 내면과는 상반되는 겉모습과 그럴듯한 사회적 지위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위선적인 인물들이 있다. 그 속에서 지혜 씨는 하루하루를 회색처럼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카페에서 박 교수를 향하여 소리치는 ‘규옥’을 만나게 된다. 그는 무색무취로 지내는 지혜와는 다르게 자신이 교수에게 당한 불합리한 처우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규옥은 지혜에게 묻는다.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말이다. 지혜는 그런 규옥에게 반감과 호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나 어느새 그로 인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인턴에게 제공되는 우쿨렐레 강의를 들으며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수강생들을 만나게 된다.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표절당한 무명의 작가 무인과 자신의 요리 레시피를 빼앗긴 채 홀로 힘들게 딸을 키우며 온라인 먹방을 하고 있는 남은 아저씨. 서로 비슷한 처지인 이들은 규옥의 설득에 의해 ‘작은 반격’에 뛰어들게 된다.


사회 곳곳에 녹아서 사는 수많은 ‘지혜’들을 생각하면 규옥이란 인물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지혜는 처음에 규옥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


‘적당히’ 눈치 보며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위 말해 조직에서 ‘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중략)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 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라야만 한다.

그러나 규옥은 지혜처럼 체념하고 살면서 전 세계가 힘 있는 소수에 의해 굴러가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남은 아저씨의 말에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는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일상에 매몰되어 ‘지혜’와 같이 수동적으로 살던 사람들에게 ‘규옥’과 같이

부당한 것에 방관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행동할 줄 아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되자는 감상은 어찌 보면 작품의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이들의 저항은 아쉬웠을 수도 있겠다.


‘규옥’이라는 인물은 ‘서른의 반격’이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나이, 세대에 상관없이 사실상 우리 모두의 내면 안에 있는 양심, 사회정의, 공정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마다 그 비중이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지혜’와 같은 소시민적인 모습이, 다른 이는 ‘규옥’과 같은 주체적인 모습이 강하게 나타난다. 소설 속에서는 규옥과 모임의 멤버들이 계획을 주도하며 공공장소에서 계란을 던지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위선적인 자들의 민낯을 발가벗긴다. 하지만 언급했듯 이들의 복수방식은 통쾌함을 준다기보단 씁쓸함을 준다.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변화시키기보단 말 그대로 개인의 작은 복수에 그치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인 지혜, 규옥, 무인, 남은 외에도 유 팀장, 그리고 김 부장과 같은 인물도 얼마 남지 않은 자리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며 누군가의 기회를 뺏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앉고자 하는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밀려나거나, 혹은 바라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아랫사람에겐 무례한 행동을 보이다가 본사의 인사평가가 좋지 않아 지혜를 정직원으로 추천하고 나가면서 착한 일 하나쯤 하고 싶었다는 김 부장의 뒷모습과 육아 이후에 보수화가 되었다며 자조 섞인 말을 내뱉다가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를 데리러 나가는 지혜의 친구 다빈의 모습은 그 현실적인 모습에 공감되면서도 한편으론 단지 오늘만을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더 이상의 사유를 포기해 버린 세태를 위한 변(辨)을 해주는 인물들로 보였다. 그들은 주인공들처럼 미혼의 서른 살이 아닌 데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므로 정의로웠던 과거와는 달리 부조리에 묵인하고 있는 현재가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일반론적인 얘기라고 본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소소한 부정 의한 일을 목도하지만 모른 체 지나치는 경우와 자신에게 피해가 갈 수 있음에도 개입하여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에서 작가가 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들이 아직 젊어서, 또는 사회생활을 많이 안 해봐서 내부 고발과 항의가 가능했다거나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어서 등의 이유를 댄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양심과 성향의 차이이지 그런 이유로 분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부조리를 간과‘해야만’하는 핑계와 이유들이 쌓이면 지혜의 동급생이었던 공윤과 한 의원처럼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와 유명세에 치우쳐서 자신보다 권력이 약해 보이는 이들의 것을 빼앗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것에 대한 인식과 반성조차 하지 못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성찰 없이 소비되는 인문학과 자기 계발서 유행 속에 감춰진 자본의 논리와 허위에 대하여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디아망 아카데미와 같은 경우처럼 인문학 강좌들은 많지만 정작 그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요지는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를 통한 ‘깊이 있는 자아성찰’이다.


서로 다른 환경, 성향을 가진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사회적인 지위에 따른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쌍방향적인 의사소통과 사유, 그것이 인문학이고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대면 강좌들이 취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인문학 열풍이 그리울 정도로 일명 ‘먹고사는 문제’로 인하여 청년들이 원하는 세상은 요원하기만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사유하는 시간’ 조차 확보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광장에 나가 부당한 것에 항의하는 것도 어렵다. 전염병을 핑계 삼아 신입월급을 주지만 경력을 요구하고 청년들은 ‘안정성’이 있어 보이는 일자리로 더욱 몰리며 사람 간의 ‘관계 맺기’를 포기한다. 이것이 등장인물들의 작은 ‘저항’이 부럽기도 하면서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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