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 속의 진주같은 이야기

모래알 속에서 발견한 문장

by 조우주

나의 고등학교에는 오래된 이름 하나가 남아 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그 선배의 이름은, 박완서.

나는 겨울 방학에 기사를 통하여 그분의 부고를 접했다. 그렇게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그 얼굴을 뵙지 못했으니, 우리의 인연은 언제나 책장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선생님의 문장을 읽으며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을 키워왔다. 교실 창가에 기대어 문제집을 펼쳐놓고도, 어느 순간 소설 속 문장으로 시선이 미끄러져 들어가던 날들이 떠오른다.


교과서와 문제집 속에 실린 선생님의 소설은 늘 수능 시험의 단골 지문이었다. 숙제를 미뤄두고 책을 읽고 싶은 날이면, ‘시험에 나오니까’라는 핑계를 대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나는 시험공부를 가장한 독서를 하고는 했다. 시험을 위한 독서였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험과는 무관한 공상에 잠기곤 했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이야기가 삶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을 때면, 전쟁의 시간을 통과하던 어린 소녀의 시선 너머로 그 시대의 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낯선 공기 속에서, 이상하게도 내 유년의 감각이 함께 떠올랐다. 시대는 달랐지만, 성장의 고단함과 문학을 좋아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자유롭고도 내성적인 성향은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깥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문장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번에 읽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서는 선생님의 또 다른 활기차고도 유쾌한 면모를 만났다. 위트 있는 농담 뒤에 숨겨진 솔직한 자기 성찰, 스스로가 좋은 어른인지 나쁜 어른인지 모르겠다는 고백, 일상의 사소한 오해와 편견을 곱씹으며 길어 올린 깨달음들. 크고 극적인 사건이 아닌, 평범한 하루 속에서 발견해낸 생각들이 조용히 이어졌다. 수필임에도 불구하고 한 편 한 편이 살아 움직이는 단편소설처럼 느껴졌다. ‘뛰어난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책 속의 말이, 문장 사이사이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한때의 나는 소설가를 꿈꾸었다.

대학 시절에는 동아리에서 단편을 습작했고, 졸업 후에는 신춘문예에 소설을 투고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문학회 활동의 영향으로 비교적 꾸준히 글을 써왔다. 그러나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의 시간 속에서, 글쓰기는 점점 미뤄두는 일이 되었다. 바쁘다는 이유는 언제나 충분했고, 쓰지 않는 날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언젠가 다시 쓰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이 에세이를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다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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