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가자!!!

창석 이억영의 응봉산 그림들과 서울의 과거와 현재

by 수다인

본 내용은 유튜브 [미술에 관한 모든 수다] 채널에서 영상으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정월대보름 날, 달맞이 명소였던 응봉산의 과거와 현재: https://youtu.be/JBm--X7ZX7o

▶ 미술에 관한 모든 수다 채널: www.youtube.com/@art_sudai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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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달을 올려 본 게 언제인가요? 오늘날 달은 그저 지구의 위성인 불모의 땅이지만 오랫동안 인류에게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았습니다. 달은 태양이 저문 밤하늘의 어둠을 밝혀주기 때문이죠. 어느 민족에게나 달과 관련된 신화나 민담 하나씩은 존재합니다. 달은 농업의 일정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주므로 농경문화권에서 대단히 중시 되어 달을 기념하는 날이 있는 게 보통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정월대보름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정월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로서 오늘날에는 중요한 명절은 아니지만 농경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던 20세기 중반까지는 중시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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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은 지역과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날로, 지역공동체 단위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한 해 풍작을, 개인적으로는 한 해 건강과 복(福)을 빌었습니다. 부럼깨기는 개인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대보름에 반드시 해야 하는 활동이었습니다. 밤, 호두, 잣 등의 견과류를 이로 깨물어 먹는 부럼은 부스럼, 즉 종기를 예방하는 일종의 주술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종기는 심각한 병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는 매우 위험한 병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역대 27명의 국왕들 중 12명이 부스럼을 앓았으며 세조(世祖, 1417-1468)의 사인이 바로 이 부스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종기는 쉽게 치료되며,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아 정월대보름은 특별함을 잃었지만 이 시기 견과류 유통이 활발해짐으로서 부럼을 통해 그 명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2.

높은 곳에 올라 밝게 뜬 둥근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 역시 정월대보름 날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달구경은 인류의 긴 역사에서 인간이 야간에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여가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설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에는 반드시 달구경을 해야 했고 이 때의 달구경을 특별히 달맞이라고 했습니다.


06P02412Ab60000.jpg 서울 성동구 응봉산 일대


정월대보름 날 달맞이 명소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의 응봉산(鷹峰山)입니다. 응봉산은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높이 95m의 산으로 남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입니다. 응봉산은 서쪽과 동쪽의 두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쪽 봉우리의 이름은 응봉(鷹峰)이며 서쪽 봉우리의 명칭은 달맞이봉(峰)입니다. 달맞이봉의 존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응봉산은 조선시대부터 달맞이 명소였습니다.


3.


IMG_2912.HEIC 이억영(1923-2009)


이억영(1923-2009)은 이런 응봉산을 사랑한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이억영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으로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졸업 후에는 주로 채색 수묵화 작업을 해 한국화가로 활동한 미술가입니다. 그는 서울의 풍경을 자주 그렸는데 특히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응봉산은 이억영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역입니다.


스크린샷 2026-03-01 오전 10.41.21.png 이억영, <응봉산> (1982)


이억영은 1982년 중랑천에서 바라 본 응봉산을 그린 <응봉산>(1982)을 완성합니다. 응봉산 중턱에는 가옥들이 들어서 있고 천변으로는 철로가 보이고 중랑천을 잇는 다리가 보입니다. 그림 속 철로는 응봉역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경의중앙선 철로이고 중랑천의 좌안과 우안을 잇는 다리는 용비교입니다. 2026년을 사는 우리에게 철로 위로 경의중앙선이 지나가고 용비교로 자동차들이 오고가는 모습은 매우 익숙한 풍경이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만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용비교는 이미 1970년에 완공되어 이억영이 1982년 <응봉산>을 제작할 당시에는 이미 응봉산 일대에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철로는 상황이 다릅니다. 1978년 경원선 기차의 간이역으로 성수역이 개통하였습니다. 이 역은 1980년 지역 행정동인 응봉동에서 착안하여 응봉역으로 정식 변경되었습니다. 경원선 철도는 2014년 12월 27일 전철인 경의중앙선으로 변경되었고 그렇게 서울 지하철 경의중앙선이 철로를 달리는 2026년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이억영이 <응봉산>을 제작한 1982년 당시만 하더라도 용비교와 경원선 철로와 그로 인해 개통된 간이 기차역은 응봉산과 응봉산 일대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상징적 존재들이었습니다.


4.


스크린샷 2026-03-01 오전 11.31.01.png 이억영, <용비교 달맞이봉에서> (1994)


<응봉산>이 완성된 12년 후 이억영은 또 다시 응봉산의 풍경을 그립니다. <용비교 달맞이봉에서>(1994)라는 작품에는 응봉산에서 바라 본 응봉산의 모습이 화폭에 담겼습니다. 이억영은 응봉산의 서쪽 봉우리인 달맞이봉에서 응봉산의 동쪽이자 정상인 응봉의 풍경을 묘사하였습니다. 응봉의 풍경 전면부에 달맞이봉과 응봉 사이의 산등성이를 따라 자라난 나무들까지 그대로 재현하고 있어서 아마 이억영은 달맞이봉에서 직접 그림을 그렸거나 혹은 현장 사진을 찍은 후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을 거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470917753_1990166234744587_5879066972632059323_n.webp.jpeg 응봉산 팔각정


그림의 오른쪽에는 중랑천과 용비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용비교 달맞이봉에서>도 당시로서는 최근에 바뀐 풍경을 감지해낼 수 있습니다. 그림의 가운데 축인 응봉산의 정상에는 팔각지붕의 정자가 있습니다. 이 팔각정은 1982년에 자신이 완성한 <응봉산>에서만 하더라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때까지 응봉산 정상에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응봉산의 팔각정은 1990년대 초·중반에 완성되었습니다. 팔각정은 중랑천 및 한강 일대의 어느 위치에서 응봉산을 보더라도 보일 정도로 눈에 띕니다. 이억영이 <용비교 달맞이봉에서>를 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응봉산 팔각정은 응봉산의 변화된 풍경의 상징이었습니다. 실제로 팔각정이 설치되면서 응봉산 일대는 차츰 근린공원이 조성되었고 오늘날에는 한강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야경 명소로 거듭났습니다. 응봉산 팔각정은 현재의 응봉산의 명성이 시작된 분기점이자 랜드마크 그 자체입니다.


5.


스크린샷 2026-03-01 오후 1.10.21.png 이억영, <응봉산에서> (1995)


<용비교 달맞이봉에서>가 완성된 다음 해인 1995년 이억영은 다시 한 번 응봉산을 주제로 수묵 채색화를 완성합니다. <용비교 달맞이봉에서>는 서쪽의 달맞이봉에서 동쪽의 응봉의 풍경을 화폭에 구현했다면 그는 <응봉산에서>(1995)라는 작품에서는 동쪽의 응봉에서 달맞이봉이 있는 서쪽과 한강이 흐르는 서울의 풍경을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풍경은 자연스럽게 화가가 위치한 동쪽의 응봉에서 서쪽의 달맞이봉 쪽으로 이어집니다. 응봉산의 산등성이와 그 밑의 한강을 따라 동호대교와 한남대교가 차례로 보이고 그 사이에 금호동이 보이며, 후경에 산비탈을 따라 집들과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선 옥수동의 풍경까지 한 화면에 담겨 있습니다.


<응봉산에서>는 앞서 제작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응봉산 일대의 변화된 풍경, 더 나아가 20세기 서울의 변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억영이 <응봉산에서>를 그린 시점은 초봄입니다. 그림 속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노란색의 향연은 바로 만개한 개나리를 표현한 겁니다. 응봉산은 오늘날 개나리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응봉산이 봄철 개나리 명소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건 비교적 최근입니다.


l_2023032301000995500081221.jpg 서울 응봉산 개나리 군락


1950년대 말·60년대 초반부터 한국은 산업 구조를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바꾸는 급격한 산업화에 돌입합니다. 서울은 이러한 사회 변화의 선두 주자였습니다. 서울에는 각종 제조 공장들이 들어서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렇게 서울은 급격한 인구 급증과 도시 팽창이 시작됩니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은 당장 주거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 전까지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지역에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달맞이봉 쪽의 옥수동과 응봉 쪽의 응봉동에는 이렇게 달동네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억영이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응봉산 일대를 그린 그림들에서 예외 없이 응봉산 능선을 따라 집들이 들어선 건 바로 한국 특히 서울의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집들이 응봉산에 들어서면서 응봉산의 나무들은 베어졌고 급기야 1980년대 중·후반이 되면 산사태가 발생할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산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정부는 응봉산에 빠르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식재를 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응봉산은 단단한 화강암 재질의 산으로서 일반적인 나무와 풀은 쉽게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개나리는 척박한 지형에서도 잘 적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응봉산에는 개나리가 대대적으로 심어졌습니다. 이렇게 식재된 개나리는 군집을 형성하였고 응봉산은 개나리 명소로 거듭났습니다. 그림 속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마저도 응봉산과 서울의 20세기의 급격한 변화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qNDEUBPhRGnE.jpg 서울 응봉산 개나리 군락과 경의중앙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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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산>, <용비교 달맞이봉에서> 그리고 <응봉산에서>에 이르는 이억영의 응봉산을 그린 채색 수묵화는 평범한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응봉산과 서울의 과거를 증언해주는 일종의 시각적 기록 자료와 같습니다. 이억영의 응봉산 그림들은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응봉산이 조선 시대에 어떠한 장소였는지, 그리고 20세기 급격한 도시 개발을 경험한 서울 더 나아가 한국의 과거를 상기시켜 줍니다. 게다가 응봉산의 서쪽 봉우리인 달맞이봉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중 하나였던 정월대보름에 대한 기억까지 소환시켜줍니다. 비록 공휴일은 아니며 과거처럼 마을 공동체가 주축이 되어 지역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지는 않지만 정월대보름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개인의 건강과 복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2026년 그리고 매년 돌아올 정월대보름에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응봉산과 같이 높은 곳에 올라가 둥근 달을 보면서 한 해 동안 개인과 가족, 더 나아가 지역과 인류 전체의 복과 건강을 달님에게 빌어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 분들은 달님에게 어떤 소원을 비실 건가요?


응봉산 달맞이봉에서 바라본 서울 한강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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