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빈의 <덕수궁 - 서울> 과 경운궁(aka. 덕수궁)의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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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4년 연속 글로벌 MZ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도시상 Favorite Worldwide City》을 수상할 수 있었던 건 K-Culture, 다양한 볼거리 및 먹거리와 함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 서울의 매력은 임상빈의 사진 작품 <덕수궁 – 서울>(2010)에서 돋보입니다.
<덕수궁 – 서울>은 세 개의 사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왼쪽 사진에는 석조전(石造殿)이 보입니다.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풍의 완전히 서양식으로 지은 궁궐 건물로서 미술관으로 사용되어 사람들에게 친숙한 건물입니다. 오른쪽 사진에는 덕홍전(德弘殿) 권역의 궁장(宮牆)이 보입니다. 덕홍전은 일제강점기(1910-1945) 덕수궁 공원화 사업에도 살아남았지만 담장은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2000년대 덕수궁 복원 사업으로 재건되었고 사진 속 궁장은 당시 새로 복원된 모습입니다. 세 개의 사진의 높이는 137㎝로 같지만 가로 길이는 가운데 사진이 좌우 사진보다 23㎝ 더 긴 86.5㎝입니다. 가운데 사진이 <덕수궁 – 서울>의 핵심인 거죠. 동아시아의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왕국의 공식 행사가 거행되는 정전(正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운데 사진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 속 건물은 “옛날 임금이 살던 집”이라는 뜻의 석어당(昔御堂)입니다. 덕수궁은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월산대군(1454-1489)의 개인 저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으로 경복궁(景福宮)과 창덕궁(昌德宮)이 전소되자 선조(1552-1608)는 월산대군의 사저를 거처로 정하고 석어당은 침소로 사용합니다. 광해군(1575-1641)은 월산대군의 사저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명칭을 하사하며 중창 사업을 벌입니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1595-1649)는 선조의 침소였으며 광해군이 폐위된 석어당과 자신이 즉위한 즉조당(卽阼堂)만 남긴 채 경운궁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 버립니다. 조선 후기 동안 덕수궁은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은 폐궁이었습니다.
그러던 덕수궁은 아관파천(1896) 이후 위상이 급변합니다. 고종(1852-1919)은 덕수궁을 왕실의 새 거처로 정하고 보수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1897년 2월 덕수궁으로 이어(移御)합니다. 그해 10월 12일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덕수궁은 황궁(皇宮)이 됩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덕수궁 확장 공사가 계속되었고 1901년 공사가 시작된 중화전은 1902년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1904년 대화재로 중화전, 즉조당과 석어당을 비롯한 건물 대부분이 전소됩니다. 1906년까지 황제는 덕수궁 내 대부분의 건물을 재건시켰습니다. 흥미롭게도 최초 준공 당시 2층 건물이었던 중화전은 단층으로 중건되지만, 석어당은 조선시대 원형대로 2층으로 복원됩니다. 이는 황제가 석어당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단청이 없는 소박한 외관의 석어당은 조선 왕실 건축의 절제미를 잘 보여줍니다. 게다가 2층 건물이어서 덕수궁이 다른 궁궐과 구분되는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조선시대에 2층 건물은 거의 지어지지 않았으며 지어지더라도 내부는 뚫린 누각(樓閣) 구조여서 사실상 단층 건물입니다. 하지만 석어당은 애초부터 1층과 2층이 분리된 다층 건물이었습니다. 고종은 석어당의 역사성과 독특한 건축미학을 존중해 원형 그대로 복원시킴으로서 대한제국이 조선 왕조를 계승한 정통 국가임을 재차 강조하는 데 성공합니다. 임상빈이 중화전이 아닌 석어당을 작품의 중심에 둔 건 이런 의미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덕수궁 – 서울> 속 덕수궁은 고층빌딩 숲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서울은 1394년 조선 왕조의 수도가 되며 한반도의 중심지로 부상합니다. 대한제국 시기 제국의 수도로 격상한 서울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의 지방 도시로 전락합니다. 광복(1945)으로 서울은 수도의 지위를 회복하지만 한국전쟁(1950-1953)으로 초토화 되어 재건 사업이 시급했습니다. 박정희(1917-1979) 정부는 1960년대 서울을 산업도시로 개조하고 1970년대 강남을 본격 개발합니다. 1990년대 한국의 산업 구조가 3차 산업으로 재편되며 서울 역시 이에 맞게 변합니다. 2000년대 초 도시재생 개념이 확산되며 과거 유산의 복원·발굴이 이루어졌고, 2010년대부터 스마트도시화를 거쳐 현재 서울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중세 도시 구조를 보존한 채 별도의 신시가지를 개발한 유럽 도시들은 계획적 도시 개발로 칭송받은 반면, 서울은 난개발의 전형으로 비판받았습니다. 서울은 서구의 도시개발 모델을 무작정 추종하는 대신, 20세기 서울이 겪은 역사성을 존중하며 근대 이전의 역사를 복원하고 자연을 회복하는 개발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서울은 초고층 빌딩이 늘어선 현대적 도시이면서도, 곳곳에 역사적 건물과 유적이 남아, 글로벌 대도시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임상빈의 <덕수궁 – 서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런 서울의 특별한 정체성을 아름답게 포착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