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좋을 순 없잖아.
멕시코 시티에 온 지 이틀째 하루가 다 지나 자정이 다 된 시간. 그제야 나는 멕시코에서 마시는 첫 데낄라를 주문할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아리엘과 나는 숙소 아래 있는 바에 가서 간단히 먹고 마시기로 한다.
"비행기 오래 타서 피곤하겠다."
"응. 진짜. 그런데 배도 고프고 해서. 간단히 먹고 마시고 하고 얼른 잠들어버리려고. "
"그래. 진짜 나도 그러고 싶다. 오늘은 정말, 나한테도 기나긴 하루였어."
평소 데낄라를 좋아하는 나는 멕시코에 와서 멕시코 데낄라를 마시는 상상으로 사실 오기 전부터 들떠있었다. 멕시코 첫 데낄라는 지쳐버린 하루 끝에서야 겨우 한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문 후 서빙되는 데낄라의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 좀 달랐다. 일단 레몬과 소금이 없었다. 바텐더에게 레몬과 소금을 줄 수 있냐고 물어보니 멕시코에서는 데낄라와 함께 상그리타 sangrita가 서빙된다고 한다. 어두운 톤의 붉은색 상그리타의 맛은 짭짤한 토마토 주스 맛이 났다.
많이 낯설었지만 그래도 데낄라 본국에서 마시는 방법으로 마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겐 흥미로운 경험이 되었다.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오는 바에서 주문한 마지막 손님이 된 아리엘과 나. 출출한 아리엘이 주문한 아스파라거스 구이와 바텐더 마음대로 제조한 칵테일 '아리엘(칵테일 이름이 뭐예요? 당신 이름이 뭐죠? 아리엘이요. 그럼 이건 아리엘이에요-의 과정으로 탄생된 칵테일. 넉살 바텐더 덕분에 안주로 웃음까지 받았다)'.
나는 당연히 데낄라를 주문했다. 피곤한 나의 온몸으로 퍼지는 아찔할 정도로 독한 데낄라를 마시니 취하는 게 아니라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오늘도 아트페어에 간다고 그랬던가? 갔었지.
어땠어? 어제는 진짜 최고.
그 머티리얼 아트페어? 페이스북으로 사진 봤어. 멋지더라. 그랬지. 진짜 환상적이었지.
쏘나 마코 Zona Maco는 멕시코 시티에서 10년 넘게 진행돼 온 대형 아트페어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볼거리가 가득하고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주던 머티리얼 아트페어와는 모든 면에서 많이 달랐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매우 실망스러운 아트페어였다.
멕시코 여행 이틀째. 택시로 40분이나 걸려서 도착한 사실이 무색해졌던 아트페어. 나는 입장 20분 만에 행사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갤러리 당 주어진 부스 크기는 머티리얼 아트페어보다 확실히 넓었다. 하지만 구성과 참여 갤러리의 컬렉션 등 전반적으로 산만했고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빅 피쳐 big picture가 보이지 전혀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스케일이 큰 것과 좋은 컬렉션으로 완성도 높은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문제점은 규모를 확장하면서 너무 많은 미술계 외부 사공들이 참여한 덕에 아트페어 본연의 예술적 분위기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대형 페어가 대형 브랜드의 후원과 그들의 후원 규모에 걸맞은 홍보 부스를 운영하는 것은 당연한 자본의 논리이지만, 홍보 부스의 규모가 페어에 참가한 갤러리 부스들 만큼 차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트페어라는 맥락에서 브랜드를 잘 보여줬으면 좋았을텐데.. 후원사들의 예술적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아쉽다.
그리고 다른 요인으로는 아트페어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다 보니, 그 본연의 정체성이 모호해진 것. 참가 갤러리들이 선보이는 컬렉션들은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했지만 전시장 한 섹션에 마련된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모인 갤러리들의 수준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조직위의 참가 갤러리 선정 기준이 까다롭지 않아 아트페어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산만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후에 찾아보니 역시나 쏘나 마코 아트페어에 대한 미술계의 혹평이 자자했다.
초심, 철학, 본질을 잃고 규모적 성장만을 쫒은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는 국내 아트페어에서도 종종 느낄 수 있는 점이다. 대형 아트페어들이 이런 식으로 산만해지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 것인 즉, 운영비용 마련과 예술적 방향성을 실현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쉬운 맘 가득한 채 페어가 열린 컨벤션 센터 밖으로 나와보니, 코끝 위로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도심 엑소더스를 보는 듯한 금요일 저녁 멕시코 시티의 도로 상황. 20여 분 만에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 탄 당시 나의 머릿속엔 '뭐든 맛있는 것을 먹어 이 실망감과 슬픔을 이겨내자! '하는 생각뿐이었다.
현지인에게 인기 있다는 멕시칸 음식점 찾아 나는 '라 까사 데 토노 La casa de Tono'로 향했다.
택시를 기다리며 비를 쫄딱 맞은 내 몸에는 한기가 들어있었다. 그런 나를 위로 해준 이 따뜻한 수프. 그리고 울적해진 내 마음에 '바스락' 거리는 식감으로 활기를 불어넣어준 고소 바삭 타코. 고마운 타코. 여기에 초록 빨강 주황의 살사(멕시코에서 먹었던 살사 중 이 날의 살사가 가장 맛있었다.)를 얹어 멕시코 맥주 파시피코 Pacifico와 마시면 멕시코 최고의 '위로 만찬'이 된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배 불렀지만, 이 날은 왠지 평소보다 더더 배부르게 먹어 허탈한 마음속을 가득 채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염소젖으로 만든 푸딩, 플란 Flanc (정확한 메뉴 이름은 grandma's recipe 였다!)까지 주문해서 달디 단 캐러멜 소스까지 싹싹 비워 깨끗하게 먹었다.
울적해진 여행자를 위한 적절한 처방전이자, 진정 위로가 된 한 끼였다.
나는 마치 소박하지만 따뜻한 마음 가득 담긴 진심을 선물로 받은 듯한 행복한 기분이었다.
실망했다며 주저앉아있지 않길 잘 했어.
비록 생각했던 것과 다른 오후를 보냈지만,
해가 질 무렵이 다 돼서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았지.
그럼 그걸로 된 거야.
이튿날 아침, 멕시코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아리엘을 위해 우리는 일정을 조금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멕시코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0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곳 멕시코 시티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현대미술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해외 유명 아티스트 전시가 국내에서도 빈번히 열리는 것을 볼 때 노마딕 nomadic 한 회화, 조각, 설치 작품들은 순회 전시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뉴욕에 사는 아리엘에게는 더욱 쉬울 일.
프리다 칼로?
바람처럼 살다 간 그녀, 프리다 칼로 Frida Kahlo의 전시는 이미 국내에서도 열린 적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도 소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녀의 작품들 또한 주로 노마딕 nomadic 한 회화 작품이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높은 편.
인류학 박물관?
멕시코는 올멕, 마야, 아즈텍과 같은 중요 문명이 꽃피웠던 지역이기 때문에 발굴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전시되고 연구되는 인류학 박물관의 스케일이 굉장하다. 하지만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만 가도 이런 문명 유산들이 차고 넘치게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물론 벽을 떼어 오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런던 영국박물관과 파리 루브르 박물관만 가 봐도 수집에 대한 광기 어린 의지라는 것이 때론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건축물의 벽이나 기둥을 떼어 오는)을 벌이는지 참 많이 봐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설마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에는 (아마도?) 문명국에서 하지 못할 일일 테니..
그래, 너로 정했다.
디에고 리베라 벽화 미술관!
아리엘과 나는 숙소를 나서서 빠세오 드라 레포르마 Paseo de la Reforma 대로변을 걷는다.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나란히 들고서.
왼쪽. 아르 데코 Art-Déco 양식으로 1946년 완공된 멕시코 국영 복권Loteria Nacional의 입구. 화려한 장식이 시선을 뺏는다.
중앙. 모서리가 둥근 빨간 우체통.
오른쪽. 디에고 리베라 벽화 미술관 가는 길에 들른 공원 마켓에서 본 귀여운 자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