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리베라,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의 길을 찾다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와의 첫 만남은 6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들른 한 갤러리에서였다.
르망 호숫가 근처를 지나 들어선 한 골목 안. 중세시대부터 있었다는 길 안으로는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모여있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다가오는 6월 말 제네바의 날씨는 정말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 그리고 그 아래의 파란 호숫가. 노천카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먹고 마시면서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도시의 여유로움과 낭만에 취한 채 나는 내 본래 목적지였던 시계박물관은 어느새 흐릿해지고, '이 근처 어딘가 시계 박물관이 있을 거야' 하는 헐렁한 마음으로 길을 쏘다녔었다.
나는 길에 들어서 있던 거의 모든 갤러리에 들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품을 하나하나 감상하던 중
한 갤러리의 플로어에 놓여있던 작품 한 점에 눈길을 빼앗겼다.
가로로 길쭉한 모양의 캔버스에는 피부라 주황색에 가까운 붉은 톤으로 채색된 사람들이 똑같은 흰 셔츠를 입은 채 일련의 구도로 서서 노동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묘사된 인물들의 얼굴은 전에 본 적 없는 이국적인 모습 었다.
"이 작품은 누구의 작품인가요? 정말 인상적이네요. "
"멕시코 아티스트 디에고 디베라 Diego Rivera의 작품이에요. "
[눈을 삽질하는 사람들 personajes paleando nieve (1956)]은 내가 당시 제네바 갤러리에서 봤던 그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1957년 세상을 뜬 리베라가 말년이 다 되어 그린 이 작품은 그가 1940-50년대에 완성한 벽화 작품들보다 한층 결이 부드러워진 인상을 준다. 특히 리베라가 선택한 컬러들은 보통의 파랑, 보통의 주황, 그리고 보통의 적색과는 확연히 다른 뭔가 더 특별함이 녹아 있는 것 같다.
눈을 삽질하면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마치 밀레가 묘사한 농부들의 모습과 같이.
특히 다양한 색상으로 채색된 인물들의 의상과 대비되는 '눈'이라는 무채색의 매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컬러를 사용해서 채색하는 아이러니가 참 흥미롭다.
그전까지 리베라의 작품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의 작품을 만난 순간 특유의 인물 묘사 기법과 우울한 듯 오묘하면서도 화려함을 잃지 않는 색감에 매료되었다.
당시 이제 갓 미술이론과 에 입학했던 학생이던 나는 (나에게는) 미지의 아티스트와 그들 각각의 작풍을 열정적으로 익혀가던 중이었고, 그 와중에 우연히 만난 리베라의 작품 세계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 멕시코)는 멕시코 혁명의 중심에서 민중을 위한 벽화를 열성적으로 그리며 멕시코 민중의 모습을 미술 언어로 표현한 멕시코의 대표 아티스트이다.
그는 1910년대 초 유럽으로 떠나 연구 여행을 떠난 디에고 리베라는 당시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를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입체주의 cubism에 심취했고, 이외에도 세잔과 같은 후기 인상주의 post-impressionism 화풍에도 영향을 받으며 파리의 새로운 미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합류하여 실험적인 작품들을 그리기도 한다.
*디에고 리베라의 입체주의 스타일 작품
당시 프랑스 화단의 상황을 고려할 때, 여전히 프랑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아티스트 이러한 프랑스의 기성 엘리트 화단의 보수적인 성향에 반대하는 인상주의, 사실주의, 야수파, 입체파 등 여러 미술사조가 19-20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꽃 피웠던 시절에 그 중심으로 들어간 리베라.
*아카데미_예술가가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아카데미가 인정하는 대회에서 인정받아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식으로 운영. 일종의 '예술 문화계 엘리트 소사이어티'로 전통적인 예술관-종교, 역사적 모티프 계승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며, 17-19세기의 유럽 국가 중 특히 이태리, 프랑스, 영국이 이 아카데미 소사이어티가 예술문화계는 물론 사교계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리베라는 당시 파리 화단에 정착하지 못한 채 멕시코로 돌아왔다고 역사가들은 평한다.
그가 정착에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이국 땅에 와서야 화가로써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발견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당시 파리는 여전히 유럽계 백인들이 주축을 이루어 문화예술계를 평정했던 시기. 생각해보면 유럽계 백인이 아닌 데다 스페인의 식민지인 멕시코 출신의 디에고 리베라를 동등하게 대우해줬을지는 의문이다.
이후 변화하는 멕시코 사회에 예의 주시했던 리베라는 호세 바스콘첼로스 José Vasconcelos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시기 1921년 멕시코로 돌아와 멕시코 정부의 주도 하에 진행된 멕시코 벽화 프로젝트에 합류, 프로젝트의 주축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멕시코 시티 곳곳에 민중을 묘사한 수많은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리베라는 스페인의 유럽식 회화 양식이 아닌, 멕시코 토착 미술 유산을 적극 반영하여 멕시코 고유의 정체성을 벽화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디에고 리베라의 일대기를 찾아보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작곡가 '조지 거쉰(George Gershwin, 1898-1937, 미국)'이다.
조지 거쉰의 작품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음악, 그리고 김연아 선수의 피겨 스케이팅 경기로 사용된 음악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편이다. 걸쭉한 재즈 선율과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익살스러운 멜로디의 향연, 그리고 폭발하는 클라이맥스까지. 거쉰의 음악은 캐주얼하면서도 여전히 세련되었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사뭇 진지하다.
조지 거쉰 또한 리베라와 같이 1800년대 말 각각 미국이라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떠나 1900년대 초 당시 모든 예술적 실험과 경험이 꽃피고 있었던 파리 Paris로 향하게 된다.
당시 조지 거쉰은 이미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인정받는 작곡가였고, 고전 음악 형식에 재즈 같은 주변부 요소를 접목하여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보다 체계적인 유럽식 음악 교육을 받고자 1920년대 중반 프랑스 당대 최고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볼레로,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등을 작곡한 인상주의 작곡가)에게 사사하고자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거쉰은 라벨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게 된다.
이미 스스로 '유일무이한 거쉰'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굳이 왜 '제2의 라벨'의 길을 자처하느냐는 라벨의 반문은 거쉰의 향후 행보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거쉰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하여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여 현대 음악가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거쉰과 리베라는 모두 '프랑스 파리'라는 세계 예술계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새로운 질서를 경험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 경험을 통해 그들은 좀 더 심층적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예술가이자 모험가였던 이들은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더 성숙한 자신으로 성장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확립해간다.
파리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한 뒤 본국으로 돌아와 이전보다 확고해진 본인만의 스타일, 혹은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 고유의 문화적 요소에 더 집중하는 식으로 작업을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대가 master의 반열에 오르게 된 예술가로 성장한다.
그들이 이런 모험을 감행하는 용기를 내지 못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세상이 추앙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관과 스타일을 확립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한 고민 역시
결국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구나.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그런 내가,
디에고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이 질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