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써 내려간 '나의 미술사' ep. 8
어린 시절,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신문 지면 광고에는 대문짝만 한 ‘여름 바캉스 세일 대전’이라는 백화점 광고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바캉스 vacance’라는 프랑스어는 곧 ‘백화점 세일’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되었다.
바캉스를 떠나는 프랑스인들 많이 찾는 지역인 ‘남프랑스’. 이미 프랑스로 여행(혹은 휴가)을 떠나온 내가, 마침 바캉스 시즌에 맞춰서 파리지앵들이 그러하듯, 자연스레 니스로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설정은 다소 실소를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는 ‘니스’로 ‘휴가’ 말고 ‘바캉스 vacance’를 떠났다.
뼛속까지 파리지앵인 친구 아주 Azous의 말을 떠올렸다. 이 말은 곧 파리와 나머지 프랑스 지방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리고 파리에서 나고 자라 살아가고 있는 ‘파리지앵’으로서 그 특유의 파리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아직 프랑스에서 ‘파리’라는 도시 밖에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이번 니스 여행으로 탑승한 기차 안에서 파리가 아닌, 나머지 프랑스 지방 풍경을 넉넉히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기차 여행을 좋아하는 나. 그런 내가 파리를 떠나, 무려 340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니스’까지의 여정은 ‘지루함’보다 ‘설렘’으로 다가왔다.
달리는 기차와 한 몸이 된 듯, 기차가 속도를 내며 프랑스 곳곳을 가로지를수록 풍경에 취한 나의 감동 속도 또한 더더욱 고조된다.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씨 뿌리는 사람’이 일구었을 밀과 감자가 자라나는 들판, 그리고 들판에 무리 지어 담소 나누는 소와 송아지들, 그리고 이따금 씩 보이는 울창한 숲, 그리고 고흐의 구불구불한 필치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드리나무가 이어지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프랑스 전원의 풍경에 나는 시선을 떼지 못한다.
(left) Jean-François Millet, The Sower, 1850. Museum of Fine Arts, Boston.(right) Vincent van Gogh, Cypresses (1889)
본격적인 바캉스 시즌이 시작되는 7월 중순, 나는 바캉스를 떠나는 수많은 파리지앵들처럼 기차를 타고 니스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출발해 5시간 40분을 달려 도착한 TGV. 종착역인 ‘니스’ 역에 도착한 기차의 자동문이 ‘취익-‘하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 듯 열리자 파리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여름 바다 특유의 짠내가 코끝을 스친다.
기차역은 환상적인 여름휴가를 꿈꾸며 니스로 떠나왔을 수많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늦은 오후 시간 대, 들뜬 분위기가 역력한 니스 기차역을 나오니 ‘환하다’라는 말로 다 채워지지 않을 만큼 밝고 맑은 여름 날씨가 나를 반겼다. 마치 파리의 태양과 니스에 뜨는 태양은 전혀 다른 것인 양, 뜨거운 남프랑스 태양 아래에 서서 쏟아지는 햇빛을 막아보려 손으로 눈 위에 차양을 만들어본다(무의미하게도). 그리고 한 손으로는 눈을 찡그리며 지도 앱을 확인한다. 대체 어느 쪽으로 걸어야 바닷가가 나오는지를 말이다.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그리고 그의 삶을 좋아한다. 특히 마티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선명한 윤곽선과 자연 그대로의 색을 캔버스로 옮긴 듯 강렬하고 한번 보면 눈을 감아도 이미지의 생생한 여운이 남는 특별함이 있다.
‘자연을 닮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있어 ‘자연’이란 ‘보거나 경험했을 때 느껴지는 편안한 상태’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하는 말은 ‘안정감’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 ‘자연’이란 ‘야생 Wildness’에 가깝다. 다듬어지지 않고, 투박하며, 그래서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끄럽지 않은 특유의 거친 표면 속 어딘가에 내가 파고들 틈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아 더 이끌리는 것 같다.
야수파 fauvism로 분류되기도 하는 마티스의 작품은 아프리카 미술을 받아 ‘원시주의 primitivism’적인, 즉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색채와 채색 방식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을 거스른 채, 아티스트의 주관적인 색채로 채색하여 그만의 작품세계를 거칠지만 강렬한 컬러와 필치로 표현하여 구현했다.
실제로 마티스는 아프리카의 목조각상과 같은 아프리카 민속예술 folk art을 수집했고, 그의 작업실 곳곳에 이러한 작품들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프리카 민속 예술품 수집 취미는 훗날 피카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 내가 마티스라는 작가에 대해서 유독 큰 관심을 갖는 부분은 비단 그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술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다니기보다는 보통 혼자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거나, 레코드샵에 가서 새로 나온 클래식 음반, 혹은 유명 연주자가 연주한 나의 최근 연습곡 앨범을 찾아 들으며 바이올린 실력 향상을 위해 몰두했다.
여느 주말 오후와 같이 나는 항상 가는 클래식 앨범 매장 근처를 지나다 근처 서점을 들러 우연히 세일 코너에 놓인 앙리 마티스의 작품집을 들춰보았다. 한눈에 봐도 압도적으로 마티스 작품의 강렬한 색채와 이미지의 형태는 물론 인상적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첫페이지에 소개된 마티스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에 끌렸다.
20대 초, 법대생이었던 마티스가 미술 작가로 전환하게 된 계기(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마티스에게 무료함을 달래고자 마티스 어머니가 미술 재료를 사서 병실에 누워있는 마티스에게 선물한 것이 그의 아티스트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마티스는 20대 초반, 맹장염을 얻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마티스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병실에 누워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병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티스는 “마치 파라다이스에 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퇴원 후 본격적으로 아티스트로써 활동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성공한 미술가로 살아가기에 그 시작이 늦었다면 늦었다고 할 수 도 있는 20대 초반에 작가의 삶을 선택한 마티스의 선택은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음악계에는 이런 말이 있지.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나보다 잘하는 이유는 나보다 더 일찍 바이올린을 시작했기 때문이고, 그 친구를 넘어서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오래 살아서 그 아이보다 오래 연주하는 길 밖에 없다고.”
어린 시절 나의 바이올린 선생님께서 내게 해 주신 말이다. 이 말인 즉, 그만큼 음악 연주를 일찍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 이유인 즉, 결국 악기 연주는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고, 어린 시절부터 연주를 시작할수록 보다 자연스러운 연주와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신동’, ‘천재’라는 수식어로 꾸며지는 악기 연주는 보통 6-7살, 그러니까 아직 미취학 아동일 때 시작해서 전문 연주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르면 6살, 늦어도 8살 정도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던 나의 실기 전공생 친구들과 달리, 초등학교 4학년, '11살'이라는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나는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실력, 테크닉, 음악에 대한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주 경력이 친구들에 비해 여러모로 뒤처져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연습시간 혹은 대학 입학 준비 기간은 동일하게 주어져 있었고, 시작이 늦어버린 나의 경우 주어진 시간 동안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였던지 나는 언제나 위대한 예술가들 중에 뒤늦게 그들의 커리어를 쌓아간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서 “이미 너무 늦은 것인가” 하며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마티스와 같이 늦게 시작한 예술가의 사례들을 접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다.
(실제로 음악계의 해묵은 우스갯소리처럼, 마티스는 뒤늦게 서야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8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가 되어서 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물론 그는 그 이전에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볼 수 있지만 말이다.)
마티스의 여러 작품 시리즈들 중에서도 컷 아웃 cut-outs 시리즈는 그렇게 투병 생활을 하며 침상에 누워 작품 활동을 골몰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 작품 시리즈이다.
슬프게도 마티스의 건강은 말년에 와서 악화되었다. 췌장암에 걸린 마티스는 더 이상 장시간 앉아서 작업하는 회화와 조각 작업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침상에 누워서 작업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 병상에 누워 첫 미술 활동을 시작했던 그가, 60년이 지나 또 다른 병환을 얻게 되어 그 이유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 시리즈를 낳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뭔가 슬프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우연이 겹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마티스는 침대에 누워 그의 조수와 함께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조수가 과슈로 채색한 색종이를 마치 3차원의 조각을 하듯 가위로 오려 대형 콜라주 작품을 제작하면서 회화와 조각이 아닌 그가 고안한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2차원과 3차원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세계로 나아갔다.
이렇듯 80세가 넘어 심각한 병에 걸린 된 상황에서도 마티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고, 그렇게 탄생한 컷 아웃 cut-outs 작품들은 미술사적으로도 전혀 새로운 형태의 ‘평면 조각 회화’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티스가 그의 말년에 컷아웃 시리즈를 완성하기 이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의 오페라 Le chant du rossignol(1919)를 위한 무대 디자인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 기법으로 작업을 했다.
러시아의 유명 예술 감독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 Ballets Russes’ 공연에서 사용된 무대 미술관 의상에서도 역시 이 컷 아웃 기법을 사용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미술을 넘어 음악, 무용에까지 그의 작품 세계를 펼쳐 갔다는 점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이처럼 자신의 활동 영역에 한계를 두지 않으면서 그러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보다 확고하고 거대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가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되 자신을 잃지 않고, 또 타의 영역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밸런스가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아닐까.
니스에서 방문한 마티스 미술관에서 나는 마티스의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니스에 도착하기 전까지 오르세 미술관에서 소수의 마티스의 작품을 본 것이 전부였다.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에서 그가 니스에서 작업 활동을 했던 실제 작업실 풍경을 담은 사진과, 그가 작업실에서 바라본 니스 해변가의 풍경들을 다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특히 마티스가 디자인을 맡았던 방스 Vence지방 로사르 성당 Chapelle du Rosaire de Vence 프로젝트의 일환인 성가대 복장은 시선을 압도했다. 사실 마티스에 관한 미술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던 그의 로사르 성당 프로젝트는 내가 언젠가 실제로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던 작품이다.
VENCE, FRANCE - JANUARY 01: Portrait of artist Henri Matisse in chapel he created. The tiles on wall depict Stations of the Cross. (Photo by Dmitri Kessel/The LIFE Picture Collection via Getty Images)
하지만 방스 지방에 방문할 기회가 전혀 닿지 않을 듯하여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우연히 니스 마티스 미술관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다가왔다.
마티스는 바다가 보이는 그의 니스 작업실에서 수많은 작품을 구상하고 또 완성했다. 그의 작업실 풍경 사진을 보니 나는 문득 프랑스 북부 내륙 지역인 Le Cateau-Cambresis가 고향인 마티스에게 이곳 니스 해변 가의 풍경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프랑스의 해안 도시 '니스 Nice'는 부유한 파리지엥들이 별장 짓기를 선호하는 오래된 휴양지로, 바캉스 시즌이 되면 니스의 고급 빌라촌은 파리에서 휴식을 취하러 남쪽으로 내려온 파리지엥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특히 남쪽으로 이태리와 인접한 프랑스의 지형 덕에 니스에서는 맛있는 이탈리안 해산물 레스토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어서 가뜩이나 맛있는 음식이 많은 프랑스에서 더 풍부한 식도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도시가 바로 이 니스가 아닐까 싶다.
나는 니스로 내려와 정착한 마티스가 되어 본다. 반짝이는 해변 가와 내리쬐는 태양,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 바닷가의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잠들 수 있는 테라스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빌라에서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로브를 입고 향이 좋은 커피를 내려 우유를 섞은 뒤 카페오레를 만들어서 해변 가가 보이는 테라스로 가지고 나간다.
파란 하늘과 태양빛에 반짝이는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 반짝이는 바다와 하늘을 번갈아보며 테라스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을 맡아본다. 카페오레를 마시며 아름다운 니스 바다를 보며 햇살과 바람을 느끼는 아침을 맞이하는 마티스의 머릿속으로, 이 풍경을 어떤 작품으로 담아 볼까 하는 상상은 이내 곧 현실로 그려진다.
마티스의 작업실 테라스 밖으로 펼쳐진 니스 해변 가는 그의 빠른 움직임 속에서 어느새 그의 캔버스로 옮겨지고 그만의 풍경으로 재탄생한다.
지난 2014년(17th. Apr. ~7th. Sep. 2014) 런던 테이트(TATE)에서 열렸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