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수련을 시작했을 때였다. 해도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 5시. 요가원으로 가는 어둔 골목 한켠에 4-50대로 보이는 남자들이 늘 모여있었다. 쪼그려 앉아 핸드폰을 보거나 담배를 폈다. 어두워 행색을 알 수는 없었지만 슬쩍 봐도 모두들 남루한 행색이었다. 덩치가 큰 남자는 덩치가 커서 무서웠고, 왜소한 남자는 두리번거리는 그 모습이 꺼림칙했고, 움츠러든 남자는 음침해서 행여 이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무서워 나는 골목을 잽싸게 지나가곤 했다.
요가를 한지 한달이 지났다. 그리고 내 눈에 비치는 남자들의 모습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저씨들은 인력사무소에서 일거리를 얻기 위해 새벽 4시반부터 집을 나선 인부들이었다. 더이상 아저씨들이 무섭다는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나이도 들만큼 들어보이던데 이 새벽에, 이 고생이라니. 저렇게 하루 벌어 하루를 살면 미래는 어쩌나, 노후는 어쩌나 싶었다. 어쩌다 저 지경까지 삶이 이르렀을까 싶었다.
한달이 더 지났다. 나도 요가를 매일같이 빠지지 않았고, 비오는 날이 아니라면 인부아저씨들도 늘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거나 핸드폰을 보며 픽업차량을 기다렸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위해 하고픈 요가를 맘껏 하기 위해 이 새벽에 일어났는데 아저씨들은 지금부터 엄청 고생이겠지? 공사장은 다칠 일도 많고 일을 많이 하면 허리도 안 좋아질텐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끝나면 술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잘 정도라는데. 그 와중에 요가할 시간을 만드는 건 힘들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한달이 지난 어느날, 차크라타다를 스무번씩 하고 땀을 비오듯 흘리고 요가원을 나선 그 날 아침. 아. 문득 번개같은 섬광이 일어나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우리가 수련하는 요가원이 있는 건물도, 우리가 운전하는 도로와 골목도 모두 거기서 새벽 5시에 픽업차량을 기다리는 아저씨들이 만들어준 것이었음을.
내가 낑낑대며 수련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집에 와 뜨끈한 밥을 여유있게 요리해 먹을 수 있었던 것도, 비 새지 않는 집에서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분들 덕분이었음을.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묵묵히 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우주의 조화 속에서, 나는 에고의 잣대로 세상과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멋대로 결론지었다는 것을.
눈이 있었으나 제대로 보지 못해 편협했고, 안다고 생각했으나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무지 속에서 수련생이랍시고 잘난체만 해왔던 것임을.
부끄러웠고, 죄송했고, 어리석음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울음이 터져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펑펑 울고나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의심과 두려움이 걷혀지고 연민이 아닌 사랑으로 가득 차올랐다.
여전히 나는 새벽수련을 간다. 아저씨들도 항상 그 골목에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분들이 무섭지도, 짠하지도 않다. 그 분들은 거기서 나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스승들이었음을, 다른 형상의 신이었음을 안다. 우리는 여전히 아는체를 하지않고 모른 척 스쳐지나가지만, 나는 매일 같이 그분들에게 마음으로서 예를 올린다.
오늘도 건강하고 평온한 하루 되소서.
안녕과 사랑의 마음을 보냅니다.
옴나마시바야.
결국은 수련이다. 세상이 힘들고 사람이 무서운 것은, 내 자신이 힘들고 내 자신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깥 세상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러니 부디 세상을, 사람을 바꾸려하지 마라. 수련을 통해 내 자신을 바꾸면 세상도, 사람도 절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