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예쁘면 예쁠수록 자신의 몸에 더 집착하기 마련이지. 어쩌면 나이들면 좋은 점은 늙고 쭈글해진 자신의 몸에 자연스럽게 덜 애착을 가진다는 점일지도 몰라. (대신 자신이 쌓아온 부나 이름에 집착하겠지만..)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는 없어. 왜냐면 욕망은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르거든.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듯, 욕망을 만족시켜주면 줄수록 욕망은 끝없이 그 다음을 원하고 또 원할 거야.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분노와 화를 불러일으키지. 충족된 욕망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말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 아래 반드시 우리는 그렇게 충족된 욕망을 잃어버리게 되어있거든. 결국 상실하고 그 상실감에 또 분노하지. 그러니 모든 욕망은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고 말아.
나도 그랬어. 20대에는 승무원이 되면 세상을 다 가질 것만 같았지.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신나게 돈을 벌었지. 수영장딸린 50층짜리 두바이의 고층아파트에서 살았고 매일같이 전세계의 온갖 체인 호텔과 뷰가 좋은 카페와 유명 레스토랑에 들락날락거렸어. 낮에는 쇼핑하고 저녁엔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파티에도 초대받아 지칠때까지 놀곤했지.
하지만 자타칭 여행중독자라 불렸던 나도 결국엔 세계여행조차 지루해지더라. 어느날 시카고에서 혼자 돌아오는 비행기 안, 좌석 스크린에서 대한항공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캐나다의 나이아가라폭포, 파리의 에펠탑, 런던 브릿지.. 화면에 비춰지는 그 화려한 장소에 몇 번이고 가봤었지만 그 순간 나는 그냥 이코노미 좌석에 찌그러진 채 피곤에 지쳐 다크서클이 발목까지 내려온 채 쓰러져 초점없는 눈으로 그 광고를 보고 있었더랬지. 아 저거 다 쓸데 없는 짓이었구나. 지금 이 순간 저 추억을 함께 나눌 사람 하나 없이 나 혼자 신나 죽을것만 같았던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여행 따위 이제 지긋지긋해.
그런데 또 쉽게 승무원을 관둘 수도 없었어. 지금까지 내가 누렸던 걸 못 누릴 거라고 생각하니 망설여졌어. 사람 마음이 간사해져가지고는 쥐고 있는 걸 도저히 놓을 수가 없더라고. 나도 모르던 사이에 나는 승무원이란 직업과 나 자신을 심하게 동일시시켜버렸던 게지.
욕망이 충족되어져봤자 그건 잠시일 뿐, 가지게 된 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결국엔 잃어버리고 좌절하고 마는 게 그 욕망의 엔딩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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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엄마가 아팠던 덕분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 직업을 그만둘 때까지 욕망과 욕망 그 징검다리 사이에 발이 푹 빠져가지고는 옴짝달싹 못하는 시간을 1년 넘게 보냈었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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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나의 제주살이 10년이 시작된거야. 나도 모르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게지. 사람이 진짜 힘들면 자기도 모르게 치유본능이 스스로를 이끌게 되어있다니까.
물론 제주에서도 무엇하나 쉽지 않은 시간들이 많았지. 욕망은 진짜 끈덕지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대저 나를 놓아주질 않거든. 내 몸에 대한 집착, 성공에 대한 집착, "30대의 여자"라는 나이와 성별에서 따라 좇아오는 그 수많은 고정관념에 대한 집착까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욕망의 수렁에 빠질 것만 같아 소름 끼칠때도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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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볼때마다 귀신처럼 달라붙던 욕망은 사실 우리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였어. 몸이 있는 한 그림자가 없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러니 처음부터 이 따위 괴롭기만 하고 새드엔딩으로 끝날 욕망 따위 가지지 않는 게 좋아라고 말해도 그게 쉽지가 않아. 그 욕망 때문에 충분히 괴로워해보지 않은 이상 그걸 받아들일 각오가 도저히 서질 않거든.
그럼 그 욕망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욕망은 생겨난다고 해.
그럼 왜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까?
그건 우리는 뭔가 결여되어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야.
그 결여된 느낌은 어디서 오지?
그건 바로 진짜 나 자신과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오는 거야. 진짜 나 자신은 이미 완전하고 풍요롭거든. 그러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가면 난 완전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어.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나 자신은 원래부터 무척 행복하고 즐거운 존재이니까.
근데 우린 자주 그 결여된 느낌을 메꾸려고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어떤 조각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계속 노력하지. 어딘가 파랑새가 있어서 그것이 우리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거라고 착각을 해. 그게 돈이든 미모이든 성공이든 그것만 있으면 평화롭고 행복할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돈과 미모와 성공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행복해지진 않아. 순간적으로 성취감을 느끼겠지만 그 뿐. 금방 우리는 다음 욕망에게 사로잡혀 챗바퀴 돌듯 열심히 또 달려나가지.
두바이의 그 강력한 욕망의 챗바퀴를 뛰쳐나올 수 있었던 건 병원에서 날 찾았던 엄마 덕분이었지. 하지만 두달도 안돼 엄마가 돌아가심. 믿었던 연인에게 차임. 뿐인가 실직과 폐차와 모함과 퇴출까지.. 온갖 삶의 악재에 흠씻 두들겨 맞았던 30대 초. 난 그냥 정신줄을 놔버릴 수 밖에 없었어.
내려놓음의 미학이 별거 아니더라. 닥치면 입이 쩍 벌어지고 손에 힘이 쫙 빠지고 다리가 풀리는 게 참 인간 신체와 정신의 시스템이 그리 되어있더라.
그리고 실컷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숲길을 쉼없이 걸었지. 미친년처럼 머리에 꽃 꼽고 오름에 올라 세찬 바람샤워를 하곤 했지. 돌틈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나를 위로해줬어. 요가를 하고 지쳐 쓰러져 사바사나를 할 때는 드러누운 바닥이 나를 포근히 감싸줬지. 제주의 봄은 그 때의 내게 정말 신의 한수였어.
근데 살만하니까 다시 욕망이 또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붙어서는 자, 이제 전처럼 집주인에게 쫓겨나지 않게 집을 사자. 집을 샀더니 자, 이제 뭐라도 있어보이게 자격증도 따보자. 자격증을 땄더니 자, 이제 능력 되니까 돈도 벌어보자. 돈을 벌었더니 헐... 다시 제자리야. 더 좋은 집을 사야한다나? 더 능력을 쌓아서 커리어를 만들라나? 요가강사니까 온갖 아사나를 다 할줄 알아야한대. 해부학은 기본이고 온갖 워크샵은 다 좇아다녀 수료증을 받아두래. 명상수련도 하고 호흡수련도 하고 티칭도 하고 워크샵도 열고..
이것 다음에 저것, 저것 다음에 그것, 그것 다음에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해 지쳐쓰러질때까지 욕망이 요구하는대로 노예처럼 다해줘왔어. 탐욕스러운 욕망은 마치 블랙홀처럼 나의 모든 에너지를 서서히 고갈시켜왔지.
그러다 어느날 문득 진이 빠져 지쳤다고 느껴졌어. 그냥 내려놓을 때가 온거야. 처음 제주에 와서 세상사에 흠씻 두들겨 맞을 때 느꼈던 것처럼 그냥 툭 다 내려놓을 수가 있게 된거야.
그래서 나는 10년만에 제주를 떴지. 왜 하필 베트남 달랏에서 반년 가까이 그러고 도만 닦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신의 인도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 의도치 않게 바이러스 덕분에 아쉬람콕을 당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말 욕망의 때를 빡빡 밀어버렸거든.
덕분에 지난 10년 넘게 막연하게 경험으로 느껴왔던 것을 고마우신 스승들과 경전구절을 통해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아.
우리의 의식은 몸이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해왔기 때문에 이 몸을 떼어놓고 바라보기가 물론 쉽지가 않아. 이 몸이 곧 나 자신이라고 쉽게 동일시해버리거든.
하지만 그렇지 않아. 이 몸은 내가 아니야. 뭔가 뭔가를 원하고 가지고 싶다는 마음의 욕망도 내가 아니야. 화가 나고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자주, 때로는 흥분되고 신나는 감정이 나를 사로잡겠지만 그 또한 내가 아니야.
그럼 내가 누구지?
깊은 잠에 빠져 꿈조차 꾸지 않을 때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생각의 저 너머로 넘어가버렸을 때의 나의 의식이 바로 나야.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숲 속에서 덩그러니 서서 양팔 벌려 호흡을 할 때, 내가 마치 한마리 물고기인냥 물 속에서, 한 그루 나무인양 숲 속에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다면 그 때의 내가 진짜 나야.
시공간의 개념이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여 한땀 한땀 영혼의 바느질을 하고 있다면, 내가 그림을 그리는지 그림이 나를 그리는지 모를 정도로 그림에 흠뻑 빠져 있다면, 140명분이 먹을 흙당근 40개를 빡빡 씻은후 칼과 도마와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두시간 당근 각을 살려 썰며 누가 말을 거는 줄도 모르고 있다면, 그 때의 내가 진짜 나야.
1시간 요가수업 마지막에 사바사나로 대자로 뻗어 누워 의식과 무의식의 그 경계에서 팔다리가 하나둘 툭 툭 바닥으로 떨어지고 마지막에 심장까지 툭 떨어져 영혼과 몸이 슬그머니 분리가 될 똥 말 똥 한 그 순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나 기분 좋은 평화와 안도감이 나를 감싸고 있는 그 순간을 지켜보고 느끼고 있는 내가 있다면, 그게 바로 진짜 나야.
셀카 화면에 잡혀 최상의 각도로 자동보정되어 찍혀진 섹시하고 어려보이는 나 말고.
수백개 유튜브 채널을 돌려보며 몇 시간동안 낄낄대놓고는 잘려고 누웠을 때 슬그머니 찾아오는 회의감에 빠져 우울해지던 나 말고.
엄빠의 딸로서, 요가 강사로서, 나이 마흔의 여자로서, 한국인으로서, 소냐라는 이름으로서, 잘 보이고 싶고, 멋있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어, 저도 모르게 어깨에 긴장을 잔뜩 둘러매고 낑낑 대며 힘들어하던 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