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라야니 Oct 22. 2021

때로는 정신줄을 놓고 키우는 직관의 힘

나를 제주에 머물게 한, 아쉬람에 머물게 한.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 달, 베낭을 매고 제주로 기약없는 홀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 내가 못내 불안했는지 절친이 제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제주에 나를 좇아왔다. 딱히 가고픈 데도 없었고 뭘 해야할지도 몰랐기에 우리는 몇 일 정처없이 여행을 했다.


햇살이 여전히 따가웠지만 하늘은 눈부시게 화창했다. 친구와 함께 했던 2011년 9월 제주의 에메랄드 바닷가가, 초록의 숲길이, 민속촌의 고즈넉함이, 창문 너머로 무밭이 보이던 숙소가 얼마전 일인 것처럼 기억난다.


몇 년이나 지나서 그녀가 얘기했다. 생각보다 내가 너무 괜찮아 보여서 신기했다고. 그래서 안심하고 먼저 육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위태로웠던 내가 제주에 왔다는 것만으로 괜찮아질 수 있었던 건 무엇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베낭 하나 덜렁 메고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는 여행을 두 계절이 바뀔 때까지 계속해야했을까.



만약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곳에 산다고 생각해보자. 건강한 음식을 먹고 꽃이 피는 계절을 만끽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고 햇빛은 찬란하고 공기는 맑다.


내게는 지난 9년간 살았던 제주가 바로 그러한 곳이다. 10년 후 우연찮게 반년이나 머물렀던 달랏의 아쉬람도 그랬다.


자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나 긍정적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심플하게 긍정적인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한 것뿐. 부정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면서 긍정적 감정을 끌어올리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완벽한 환경에서 살 수는 없다. 그럴지라도 지금 내가 있는 환경을 이와 비슷하게나마 의식적으로 변화시켜나갈 수는 있다.


의식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그 힘. 그것은 직관의 힘이다. 누구나 내면에 신성이 있어 눈을 감고 그 목소리에 집중하기만 하면 "직관"의 힘으로 명확하게 가야할 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소음이, 넘쳐나는 정보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  도시의 자동차나 지하철 소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희노애락을 노래하는 음악을 듣는다. 시도 때도 없이 유튜브를 보고 사람들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혼자 있을 때도 카톡이나 메신저는 끊임없이 날아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도시에서는 시선이 머무는 곳에 위치해있는 자극적인 광고들이 무의식에 저장되어 마음에 소요를 일으킨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흥분시키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다운시킨다. 그리고 에고는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을 "좋다", "나쁘다"로 제 멋대로 평가하고 떠들어댄다.


우리의 에고는 침묵을 어색하고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침묵 속에서 에고는 멈추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이성과 논리는 힘을 잃는다. 모든 업앤다운이 정전된 마냥 꺼진다.


그러나 에고의 주인이 아닌 노예처럼 구는 우리는 침묵대신, 논리와 이성으로 스스로를 무장시키고 끊임없이 사고를 계속한다. 어젯밤에 본 드라마가, 스치듯 지나간 광고가, 틀어둔 티비에서 흘러나온 뉴스가 쉴 새 없이 감각을 타고 내게 들어와 감정을 주물럭거린다. 업앤다운을 조장하고 침묵을 방해한다.


나의 생각이고, 나의 감정이고, 나의 지성이지만 대게 그것들은 나의 의지대로 흘러가주지 않는다. 그리고 에고에게 끌려다니는 우리는 으레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우리는 "사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생각되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왜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적으로 업앤다운을 겪으며 부정적 생각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위와 같이 이 모든 상황을 지금까지 의식적인 주시 없이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뒀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주시가 필요하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냉철한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 언뜻 대단한 결심과 행동력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의지는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정 자연스러운 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한 나로. 직관에 의식을 맡기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말이다.  


그게 어렵다면 그냥 정신줄을 살짝 놓기만 해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직관의 힘을 키울 수 있다. 그리하여 내면의 신성이 빛으로 우리를 인도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2011년의 초가을에 베낭을 메고 제주로 떠났던 이유이다. 두 계절을 정처없이 자연 속을 거닐며 게스트하우스를 떠돌았고 기어이 그 해 바닷가 앞에 집을 구했고 제주에 정착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 때에도 나의 고집스런 에고는 서울에 가서 아직 젋을 때 번듯한 직장을 구해야한다고 발악하듯 외치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항공사로 돌아가자고도 꼬셨다. 나의 이성과 논리는 통장잔고를 보여주며 야멸차게 나의 백수생활을 비웃었다. 나의 감정은 떠나버린 엄마를 떠올려 폭풍눈물을 흘리게 했고 말없이 돌아선 전남친을 향한 분노의 칼을 갈게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한채 침묵했다. 제철음식을 요리해먹었고, 매일 매일 요가를 했다. 그리고 숲으로 가서 걸었다. 비를 맞으며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쪽나라 꽃들에 흥분했고 바위 틈에서 자라난 나무들을 경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름에 올라 크게 심호흡하며 바람샤워를 했다.


에고가 "그래도.. "라고 제 목소리를 낼 때도 휩쓸리지 않고 그 마음을 의식적으로 주시했다. 도서관에 처박혀 직관이 가리킨 책을 읽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내면의 신성을 끌어올렸다. 제주여행과 이주정보를 알려주는 포스팅을 몇 시간씩 써댔고 예비승무원들을 대상으로 무료 카운셀링도 밤늦게까지 했다. 나의 존재가 나만을 위한 존재가 아님을 알아차릴 때야 비로소 가빠졌던 호흡이 평화로이 가라앉곤 했다.


지금의 나는 그 때처럼 격렬하게 에고와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여전히 감정의 업앤다운은 계속 되고 이성과 논리로 계산도 쉴새 없이 한다. 눈 앞에 보이는 너무나 리얼한,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 여전히 나를 현혹한다.


이른바 요가원을 넘겨줄테니 알아서 운영해보라는 유혹이라든가, 세상을 새까맣게 덮친 코로나 바이러스라든가, 이 때문에 거짓말처럼 끊겨버렸던 세상의 모든 비행기들이라든가.


하지만 나는 시간차를 둬서라도 눈 앞의 것들을 의식적으로 주시한다. 논리나 이성이 아닌 직관의 힘을 믿고자 한다. 내 안의 신성을 따르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성애자라 자칭하던 나는 지난 겨울 과감히 제주를 떠날 수 있었다. 갭이어랍시고 거창하게 1년을 여행하며 놀겠다고 큰소리를 쳐놓고는 6개월째 아쉬람에만 콕 박혀 수련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다 끊겼다. 비자연장이 불투명해졌다. 바이러스가 내 목덜미를 쥐어틀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는 아쉬람에서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그것들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스스르 알아서 사라졌다. 원래부터 실재하지 않았던 환상이었다는 듯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그저 주시한다. 그 뿐이다. 숲 속을 걷는다. 자연이 주는 프라나, 그 에너지를 마음껏 받아들인다.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노래를 아침 저녁으로 목청껏 부른다. 돈을 받고 일을 하기는 커녕, 되려 돈을 주고 봉사를 한다. 새벽에 일어나 명상을 한다. 호흡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고 정화를 시킨다.  아사나를 통해 오랜 긴장을 해소하고 깊은 이완을 만끽한다. 깨끗하고 건강한 계절 음식을 직접 해서 먹는다. 아힘사, 즉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비폭력 수련을 한다.


내가 아쉬람에 머물며 배운 것들이다. 일상에서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따라해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주시하며 부정적인 환경을 하나씩 제거해나갈 수는 있다.


SNS와 잡다한 토크, 자극적인 뉴스, 티비, 유튜브에 허비하는 시간을 줄여나가는 것. 핸드폰을 침실에 두지 않고 일찍 자는 것. 일찍 일어나 이부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청소를 하는 것.  단 1분이라도 좋으니 규칙적인 명상 습관을 가지는 것. 완전채식이 아니더라도 육식을 줄이고 인스턴트 음식을 피해 직접 제철음식을 요리해 먹는 것. 매일 숲에 가지 못해도 일상에서 자연에 눈을 돌려 나무 한그루를 찾아 바라보는 것. 하루 한시간의 요가와 호흡. 규칙적인 산책. 대가를 바라지 않는 노동. 신실한 봉사.


작은 것에서부터 의식적인 변화를 스스로 이끌어낼 수 있다. 매일 매일의 이 작은 변화가 그 날 그 날의 성취감을 느끼게 해줄 것이며 그 성취감이 직관의 힘을 더 키워줄 것이나니.


이전 03화 욕망의 노예로 살 것인가. 성장하는 삶을 살 것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