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하고 따뜻한 냄새가 잠든 코끝을 간지럽힌다. 눈꺼플을 밀어올리니 내려오는 햇빛의 각도마저 더없이 익숙한 내 방임이 분명한 창문과 천장이 비스듬히 보인다.
선영아, 일어났나. 밥 무러 온나 ~
부엌에서 치지직.. 뭔가 굽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이불을 젖히고 맨발로 방문을 열고 나가본다. 작은 부엌에 서서 눈빛 반짝이며 찌개의 간을 보고 있는 엄마가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깃털이 내려앉듯 엄마를 뒤에서 가만히 껴안는다.뺨에 닿는 엄마의 등이 따스하다.어제와 똑같은 엄마의 체취다.
아. 꿈이었구나.
여기가 현실이구나...
나는 엿가락처럼 흐물흐물해져서는 엄마 등에 딱 달라붙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엄마. 내 꿈꿨다.
무슨 꿈..?
엄마는 아기원숭이처럼 등 뒤에 매달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꺼내놓은 파를 총총 썰며 묻는다.
어... 꿈 속에서.. 내가 서른 다섯살이드라.. 완전 어른이 되가꼬.. 15년 뒤든데...
지금도 다컸다 아이가. 스무살이면 어른이지 아~가? 그래 서른 다섯에 결혼은 하고 애도 있드나?
엄마 등에 얼굴을 묻고 흐릿한 꿈을 기억하러 애써본다. 엄마가 움직일때마다 대롱대롱 매달리며 나는 대꾸했다.
엄마. 15년 뒤에는 결혼적령기가 25살이 아니라 35살이라카드라. 사람들이 싹 다 서른 넘어 결혼하대.
아이구야. 엄마는 서른 다섯에 너네 둘다 국민학교 보냈는데?
말해놓고 엄마는 뭐가 우스운지 까르르 웃고는 또? 하고 호기심있게 묻는다.
..또.. 음.. 내가 비행기 타는 승무원을 4년이나 했드라. 엄마 데꼬 막 세계여행도 다니고.
사실 세계여행까지는 아니고 엄마 모시고 잠깐 유럽에 여행갔다 온 거지만꿈 속의 일이니까 난 일부러 과장해서 말한다.엄마는 고갤 돌리고 날 보며 방긋 웃으며 답한다.
거봐라, 엄마는 우리 선영이가 승무원하면 잘 할끼라고 했다아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내가 또래에서 제일 키가 컸다.그러자 엄마는 우리 딸 키가 크다고 승무원하면 좋겠다고 종종 말씀하시곤 했다.나는 홱 고갤 돌리며 나는 그런 거 싫더, 남들 시키는 심부름 하는 거.. 라고 대답하곤 했고.
음. 또.. 내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드라.
제주도 좋지~ 엄마도 거 가서 살고 싶다~
엄마는 흐뭇하게 웃으며 떠나요~ 제주도~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노래를 흥얼거린다.엄마의 허밍이 등을 통해 내 뺨으로 전달대는게 좋아서 나는 등 뒤에서 엄말 더 꽉 껴안는다.
.......근데 거기엔.. 엄마가 없었어..
나는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흘려버린다.
자. 다 됐다. 밥 먹자. 얼른 아빠랑 오빠 깨워온나.
엄마 등에서 몸을 떼자 불현듯 약 생각이 떠오른다.
참 엄마, 혈압약 잘 먹고 있나?
아이구야. 그런 거 안 무도 된다. 그거 먹기 시작하면 평생 무야 된다 카든데. 엄마는 괘안타.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 먹고 나아야제, 약 안 무도 된다.
엄마는 부러 호기있게 말하며 어서 깨워라고 나를 부엌에서 좇아낸다.아빠와 오빠를 부르며 나는 엄마가 병원에서 타온 약이 어디있더라 두리번거린다.
이제부터 약봉지에 오늘부터 날짜와 아침/점심/저녁을 적어놓고 매일 삼시세끼 밥을 먹고는 엄마에게 꼬박꼬박 약을 먹여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꿈이 정말 리얼했다며.
정말.. 내가 15년을 더 산 것 같은 느낌조차 든다며.아득하지만 20대의 청춘을 재미있고 치열하게 보냈던 기억,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누볐던 기억,내가 살았던 일본, 호주, 두바이, 제주도가 그림처럼 다 그려졌다.
꿈 속에서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여행도 다 해보고해외에서도 실컷 살아보고 열정적인 사랑도 다 해봤다.그러고 나니까엄마가 여자는 요리며 청소며 배워놔야한다며 늘어놓던듣기도 싫었던 잔소리가 갑자기 달콤하게 느껴진다.
엄마와 요리하고, 엄마와 청소하고,엄마와 아기자기하게 집안을 꾸미는게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요가선생님인 엄마한테 하루에 한 동작씩 요가를 배우고오늘은 좀 더 내려갔네.. 하며 매일 매일 칭찬 한마디씩 듣고 엄마가 쓰담쓰담 해주면 좋겠다.
함께 명상을 하고 깊은 호흡을 내쉬고 마주보며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주는 그 시간이얼마나 감사한 건지 나는 문득 깨닫는다 .
그래. 이제 엄마가 그림을 그리면 옆에서 나도 같이 스케치를 해야지.뒷산에 약수뜨러 가자고 하면 이제부턴 벌떡 일어나 꼭 같이 가야지.최근에 읽고 있는 걷기예찬이나 월든 같은 책은 엄마도 분명 좋아할테니 같이 읽자고 해야지.아. 맞다. 엄마랑 제주도 여행가서 엄마 좋아할 것 같은 맛집도 가야지.
엄마와 하고 싶은 일이 계속 계속... 끊임도 없이 자꾸 생각난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할 수록 슬퍼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깼다.
베갯머리가 젖어있다.어둑어둑하고 낯선 천장.15년 전 고향집을 나오고 나서부터 나는 몇 번이나 천장을 바꿔왔던가.
엄마와 하고 싶은,꿈 속에서 계속 계속 되뇌었던 그 많은 일들 중 그 무엇도 함께 할 수 없는 곳.이 곳이 그리고 지금이 내가 있는 현실임을 깨닫는다. 북받쳐오르는 뭔가에 으앙. 아이처럼 소리내어 크게 한번 울음을 터트려 운다. 그리고 으레 하듯이코를 크게 팽 하고 풀고 일어난다.
닫혀있던 커텐을 연다.찬란히 쏟아지는 햇살이 머리맡에 내가 간밤에 다 읽고 둔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이라는 책을 비춘다.그 때 스무살 무렵에 나도 나미야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편지를 썼더라면... 그 때 미래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신랄하게 내가 해야할 일을 말해주었더라면..그런 생각으로 책을 다 읽고 간밤에 잠이 들었었나보다.
책 속에서나 가능한 상상은 부스스한 머리를 꽉 묶으면서 함께 꽉 묶어버린다. 찬 물에 얼굴을 때리듯 세찬 세수를 하고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간단히 아침 밥을 차려먹고 집 밖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