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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야니 Mar 24. 2024

붓다선원, 그 100일 수행의 시작

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음 이곳에 갔을 때 들었던 제일 처음 들었던 법문에서 어느 수행자가 질문했다. 흠칫. 이 몸마음도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서 집을 뛰쳐나와 여기 왔는데 질문의 동시성에 놀랐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완전한 용서는 이해와 연민입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에는 그만의 배경의 있을 거예요. 그의 무지, 탐욕, 성냄, 번뇌들이요. 그걸 이해해 주고 연민해 주는 거예요. 그 사람도 피해자임을 이해함으로써 연민이 일어나고 용서가 일어납니다. "


스님은 이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스님에게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바로 위에 오빠가 국민학교 때 자신을 자주 때렸다고 한다. 그 오빠는 지체장애가 있어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놀리고 때렸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보다 작고 약한 여동생을 대상으로 그 화를 풀었던 것이다. 스님은 어른이 되고 출가를 하고 나서도 오빠에 대해 용서의 마음이 일지 않아 가족 얘기를 할 때가 있어도 오빠만은 빼놓고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스님은 고요한 명상 속에서 눈물이 주르륵 났다고 한다.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 배를 타고 고기잡이일을 하게 된 오빠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 "이렇게 살아서 뭐 하누, 하고 배에서 확 뛰어내려 물고기밥이나 되자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이번에도 안 죽고 돌아왔습니다. " 여동생인 스님이 출가를 했을 때는 "내가 너무 때려서 중 되러 갔지!" 하며 붙들고 물었다고 하던 그 오빠. 망망대해에서 몇 번이나 바다에 빠져 죽으려 하는 모습 속에서 그의 괴로움에 대한 이해가 일어나 눈물이 주르륵 흘렀던 것이다. 이해가 되자 눈물이 나며 연민과 함께 용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세상에 없던 사람으로 생각했던 오빠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연민할 수 있는 조건은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연민입니다. 또는 타인을 이해하고 연민할 수 있게 됨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만, 자기 자신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쉽습니다.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려면 먼저 고요해져야 합니다. 그 고요함의 힘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깁니다. 고요한 속에서 바라보는 힘을 통해 이해가 일어나고 이해와 함께 연민이, 그리고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고요함 속에서 먼저 "내가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 하고 자신에 대한 자애를 품어보세요. 그다음 그 사람과 모든 사람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품어줍니다. 남을 용서하기는 어려워도 나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기는 조금 더 쉽기 때문에 먼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탐심, 무지와 자만을 이해하고 연민하고 용서하게 되면 형제와 부모,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용서하기가 쉬워집니다. "


100일도 더 전에 들었던 그 법문은 지금도 생생히 생각나 이렇게 글로 옮길 수 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아니 머리로는 이해는 되었어도 가슴으로 차마 내려오지 못해 체한 것처럼 먹먹했었다. 하지만 그 길을 먼저 걸어가 길을 안내해 주는 스승이 있다면, 그로부터의 자비심과 에너지를 받아 그 길을 좇아가면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이곳을 찾아간 첫날 하고 싶었던 질문과 필요로 했던 희망찬 답변이 함께 하는 내용의 법문이 타이밍 좋게 들려오다니. 세상에 결코 우연은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스님의 안내대로 100일간 핸드폰을 일시정지하고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은 채 묵언하며 고요함 속에서 지냈다. 그 고요함의 힘으로 바라보는 힘도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이해와 연민과 용서가 진행되어 갔다. 아직 스님처럼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의 완전한 용서가 되지 못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연민, 용서가 부족한 탓임도 알고 그런 이 마음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100일이 끝나 하산하여 이 몸과 마음은 속세로 돌아왔다. 라면과 타코야키를 사 먹을 수 있고(이 속세의 맛이 그렇게 먹고 싶더라), 믿고 기다려준 가족과 친구들의 연락이 너무 고맙고 반가운 곳. 그러나 동시에 호랑이 굴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은 두려운 곳.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100일간 붓다선원에서의 기록과 경험들을 여기 풀어보려 한다. 부디 이 글들이 "나"를 내세우려는 어리석음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행여 그렇게 되더라도 머지않아 스스로 이 글들을 보며 알아차리며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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