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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Jan 16. 2024

도와주세요!

이교수가 추천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이 든 간호사가 이름을 묻고는 예약하지 않아서 진료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간호사에게 초진만이라도 보고 약처방을 받고 싶다고 했다. 간호사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난감해졌다. 초조하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의 불안한 행동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간호사가 잠깐 초진만 보신다고 하니 진료실로 들어가라 했다.


머리가 거의 그레이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남자 선생님은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다.


“제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차트의 내용을 다른 의사가 볼 수 있나요? 혹시 다른 의사가 제가 여기서 진료 본 사실을 알면 안 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의사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이혼소송을 준비하는데 남편이 의사예요. 그런데 제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집에서 나왔는데, 남편 몰래 숨어있고 싶어요. 소송이 시작되기 전까지요. 그런데 제가 지금 너무 불안하고 잠을 못 자서 수면제가 너무 필요한 상태

라서요...”


의사는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쏟아내는 나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로 이혼하려고 하시죠?”


“남편이 30 년 전 사귀던 여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헤어지고 난 후 저와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증거를 지난주에 확인했거든요. 배신감과 복수심에 제가 제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데 지금 제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잃을 거거든요. 이 불안함을 조절하고 잠도 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해요.”


계속 한숨을 지으며 마스크만을 만지작거리며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의사는 한참을 쳐다보더니 밖에서 검사지를 드릴 테니 간단히 테스트를 하고 다시 보자고 해서 진료실을 나왔다. 나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체크하는 검사지에 나는 솔직하게 답을 하고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다.


“지금 수치가 참 이상해요. 분노와 스트레스가 이 정도면 이성적 일 수가 없는데, 감성 점수는 너무 낮거든요. 지금 정신줄을 꼭 붙잡고 계신가 봐요?”


“네.. 그러려고 노력 중인데 한 번씩 통제가 안되고 미칠 듯이 불안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분노폭발 안 하셨어요?”


“네 안 했어요! 지난 일주일 동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려고 참고 참았는데.. 이제 감정이 너무 올라와서 이성을 통제할 수가 없네요.”


의사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나를 바라보면서 마스크만 만지작 거렸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오늘 처방해 드릴 테니 약 드셔보시고, 일주일 후에 다시 뵙기로 하죠.”


병원에서 나와 호텔로 돌아와 남편의 핸드폰 연락처명을 바꿨다. 결혼 전부터 “그이”라고 지칭되어 있는 명칭을 보며 주변 교수들은 닭살 돋는다면서 놀리곤 했다. 하루에도 30 통 이상의 문자를 주고받는 우리를 보며 후배들은 부러워

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롤모델이고 가장 이상적인 가정인 것 같아서 우리를 보면 결혼하고 싶어 진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연락처명은 “변태 개새끼”다. 소심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였다.


이혼한 지 2년이 넘었지만 난 아직도 그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면담을 하고 수면제와 우울증 약, 항불안제를 처방받아온다. PTSD와 우울증이 나의 진단명이고 수면제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계속 늘어날까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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