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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Jan 16. 2024

혼자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급하게 월세 오피스텔을 구하면서 다시 한번 이제 나 혼자라는 생각을 했다. 부동산을 뒤지면서 바로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오피스텔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찌는 더위에 찾아간 부동산에서 보여준 첫 집은 청소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천장과 벽에 짜장면을 던진 흔적이 그대로 남은 채였고 화장실의 변기는 공중화장실보다 못한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리 이혼을 위해 남편을 피해 집을 나온 상태지만, 이런 곳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처량하고 비참하게 느껴질 것 같아 빨리 나와버렸다. 부동산 사장도 미안했는지, 소개한 부동산에 전화를 해서 너무 엉망이라고 도저히 이 상태로는 집을 보여줄 수 없으니 집주인과 상의해 보라고 전화를 하며, 나에게 다음 곳은 여기보다는 나을 거라며 다독였다.


일단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와서 공인중개사가 여러 곳으로 전화를 해보더니, 괜찮은 곳이 있는데 가보자고 했다. 이렇게 호텔을 전전하며 지내는 것이 곧 다가올 개강준비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불안감을 조절하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서둘러 계약을 했다. 현 세입자가 내일 오전에 나가니 나는 오후에 청소대행을 부탁하고 보관된 이삿짐을 내일 오전에 가져오도록 연락했다. 호텔로 돌아와 평면도를 보면서 들어갈 세간살이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고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이라고 주변에서 본인들 집의 인테리어를 부탁할 정도의 감각이 있는 터라, 평면도를 보며 사이즈를 어림짐작으로 필요한 가구와 당장 필요한 가전제품들을 주문했다. 다행히 이케* 가구가 다음날 오후에 조립 서비스까지 가능하다고 하니 하루만 고생하면 편히 잠잘 곳이 생길 것 같았다. 그나마 이거 저거 준비하는 과정에는 불안함과 분노를 잊고 온 신경을 거기에만 쏟을 수 있어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나를 죽이려고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 만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사와 세간살이를 준비하느라 지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호텔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차에 트렁크 2 개를 싣고 오피스텔 주차장에 내렸다. 이런 대단위 건물에는 처음 살아봐서 주차 등록, 공동현관 등록, 입주자 등록, 현관 비번 등록 등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알아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쓰레기 분리수거와 택배 전달 방법, 방문자에 대한 주차 서비스, 공동 서비스 공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데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신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한참 관리사무소 설명을 듣고 있는데 집주인이라며 전화는 계속 오고, 땀은 비오 듯 흐르는데, 자꾸 주는 종이쪽지는 뭐가 그리 많은지 나중에 읽어보라는데 이게 다 뭔지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이케*에서 배달과 조립 서비스를 하러 왔단다. 관리사무소에서 급히 올라와 보니, 이게 다 내가 주문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박스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엄청난 양에 놀란 이케* 기사 역시...


“이게 다 여기 들어갈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짐이 없어서... 일단 들어오세요”


방 안에는 이삿짐 창고에 보관했던 작은 박스 10 개와 트렁크 2 개뿐이었다. 대충 빌트인 장에 넣고 보니 방 안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이케아 기사는 “ 아하~ 다 들어가겠네요.”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이케아 기사는 의자부터 조립해 주면서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아마 오늘저녁까지 해야 할 거예요.”


싱글침대를 조립하고, 책상을 조립하던 이케* 기사가 날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시던 일이 잘 안 되셨어요? 어떻게 짐이 하나도 없어요?”

나도 모르게 “남편이 내연녀가 있었어요. 결혼한 지 28 년인데 상간녀와는 30 년간 유지해 오던 사이라는 걸 지난주에 알게 되었고 나를 죽이고 둘이 노후를 함께 하기로 한 사실을 알게 돼서 너무 무서워서 몸만 나왔어요.”라며 술술 털어놓게 되었다.


“아이고.. 많이 놀라셨겠네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며칠 전에 변호사 선임했고 이혼 소송하려고요. 소장 준비하기까지 얼마간 숨어서 지내야 해요. 남편이 의심이 많고 난폭하거든요.”


“저랑 똑같으시네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아버지가 내연녀가 있었어요. 어머니가 알고 난리를 쳤지만 그 당시 만해도 이혼이 쉽지 않았잖아요. 우리 형제가 이혼하시라고 해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하셨어요. 결국 20 년 넘게 애끊이고 고생하시다가 얼마 전에 이혼하셨는데, 아버지가 집에서 나가질 않아요. 들러붙어서 계속 돈 내놔라, 술 먹고 행패 부리고... 저희 형제는 어머니한테 꼼짝 못 해요. 얼마나 고생하고 힘드셨는지 알기 때문에....”


“어머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전 그 사실을 알고 1 주일 동안 고민하면서 얼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는데.... 정말 어머님께 잘하셔야겠어요.”


“그럼요,... 아버지 생각만 하면 지긋지긋해요.”


“전 아직 아들들에게 말을 못 했어요. 아들들이 그냥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 줄 알아요. 남편도 제가 집을 나간 게 어이없다고 하더래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전 아이들이 이런 사실 알면 너무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에요. 처음에는 다 까발려서 망신을 주고 싶었지만, 아이들에게 너무 큰 트라우마가 될 것 같더라고요. 기사님도 아들로서 그런 사실 알았을 때 많이 힘드셨어요?”


“네 너무 힘들어서 말썽 많이 피웠어요. 제가 고등학생, 여동생이 중학생 때였거든요. 다 싫더라고요. 아버지가 잘못한 거라는 걸 알지만 어머니도 밉고, 세상이 다 싫어져서 학교도 안 가고.... 후후”


“우리 애들은 27 살 20 살인데, 둘째가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서 그때까지 참아보려 했지만, 내가 죽을 것 같더라고요. 너무 내 생각만 한 거 아닌가 후회도 되는데, 변호사나 주변 사람들이 그러다가 내가 죽는다고... 나 자신만 먼저 챙기고 그 후에 아들들 챙기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맞을 거예요. 애들이 모르지 않아요. 처음엔 엄마를 원망하지만, 크면 누구의 잘못인지 너무 잘 알게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친정에도 좀 알리고 도움을 청하시죠?”


“친정 부모님이 엄청나게 반대하는 결혼을 했어요. 아마 그 봐라.. 내 뭐라고 했냐.. 하시고 남편에게 가서 난리 치시면서 감정적으로 대처하실게 뻔해서요. 그러면 노부모님께서 충격으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더라고요.

내가 한 선택이니까 그냥 혼자 처리하는 게 힘들어도 마음이 편해요.”


“제가 빨리 조립해 드릴 테니까 옆에서 좀 쉬고 계세요”


1 시에 시작한 가구 조립은 저녁 7 시가 다되어서야 끝이 났다. 침대와 수납장, 책상과 의자, 암체어와 스탠드 조명까지 놓으니 제법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마지막 작은 탁자까지 조립해 준 이케* 기사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저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창피한 내용의 하소연을 했는데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공감해 준 분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려고 저녁식사 하시라고 5 만원을 드렸는데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고 가시면서 ‘다 잘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 푹 주무세요.’라는 말에 가슴 한구석에서 뭉클함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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