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느라 어젯밤에는 정신없이 골아떨어졌다. 병원에서 준 수면제를 먹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고 일어나 보니 6시 반이었다. 눈을 떠보니 내가 있는 이 공간이 너무 생소해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아하... 내가 이사를 왔지... 내가 정말 집에서 나와서 이사를 왔구나... 이제 이게 내 집이구나...’ 실감이 나질 않았다. 창문을 바라보면서 지난 며칠간의 일을 생각해 봤다. 집을 나와 호텔에서, 다시 짐을 들고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다시 호텔로, 이제 오피스텔로. 순간 내가 피해자인데 내가 왜 이렇게 도망쳐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2021년 8월 초 전남편은 일주일 전 뉴욕으로 출사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하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시부모의 빚을 갚느라 하루하루가 버겁던 신혼시절을 지나 이제 좀 살만해지니 그는 취미를 갖기 위해 많은 도전을 했고 그중에서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았으며, 10년 전부터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등 일 년에 2~3번씩 해외로 출사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전남편을 혼자 여행을 가게 해?”
“그러다 큰코다친다!” 라며 염려를 했지만,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힘들다며 우기는 전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우선적으로 그를 믿었기에 혼자 가는 출사 여행을 묵인해 주게 되었다.
5일 아침 전남편이 내일부터 출근하니까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전남편이 먼저 화장실을 쓰고 바로 내가 들어가서 준비를 하는데, 전남편의 지갑이 보였다.
왜 그랬을까?
무언가에 끌리듯이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전남편의 지갑 속을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여자의 미국 운전면허증과 까르티에 명함 그리고 필름형 발기부전 치료약이 5개 들어있었다. 탈모약을 이유로 10년 넘게 부부관계를 거부해 오던 전남편에게 이런 것이 왜 필요할까? 순간 나도 모르게 내용물들을 핸드폰으로 찍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곤 지갑을 제자리에 두고 나왔다.
전남편과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온통 지갑 속의 물건들 생각뿐이었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 지금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한 잔 하고 싶다는 그를 위해 슈퍼를 들렸다. 저녁을 먹고 맥주까지 마시고,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던 터라 전남편은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렸다.
늘 TV를 켜놓고 거실에서 자기 때문에 안방에 있던 나는 TV를 끄기 위해 리모컨을 드는 순간 바로 옆에 있던 전남편의 핸드폰을 터치하게 되었고, 그 순간 화면에는 상상도 못 했던 사진들이 보였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 배로 뛰어 숨이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이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전남편의 핸드폰을 들고 주방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의 사진들을 천천히 보았다. 그 안에서 전남편의 지갑에 있던 미국 운전면허증 사진의 여자와 함께 타임스퀘어에서 찍은 키스하는 사진을 한참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다가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본 것은 둘의 정사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었다.
숨죽여 울면서 전남편이 잠들기 직전까지 누군가와 대화하던 카톡의 내용을 보게 되었다. 그건 바로 사진 속 여자와 나눈 선정적이고 어디에 옮기기조차도 부끄러운 적나라한 그냥 날 것의 자극적인 대화들이었다. 머리가 멈춘 상태에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멍한 채 생각이 멈춰버렸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이걸 지금 바로 노출하는 게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잠든 전남편이 거실에 있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핸드폰의 사진들과 동영상을 찍고, 카톡의 내용을 저장하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파일로 만들어서 내 메일로 보내고, 보낸 메일함에 흔적을 지웠다. 핸드폰을 다 뒤진 후 원래 자리에 두고, 출사 여행에 가져갔던 카메라의 사진들을 확인했다. 온통 그 여자와 함께 한 사진들 뿐이었다. 타임스퀘어, 베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브룩크린, 헬기여행, 와이너리 여행까지 모든 곳에 상간녀와 전남편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그 와중에 내 안에 이성은 ‘정신 차려. 빨리 증거를 수집해야 해.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 거야... 어서 정신 차려’ 소리치고 있었다. 용량이 너무 커서 복사가 되지 않아, 기존에 가지고 있는 외장하드를 포맷해서 천장이 넘는 모든 사진을 다 복사해서 넣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안방 침대로 돌아와 창문 밖에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전남편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고 아들들을 깨웠다.
모두를 내보내고 나는 출력소에 가서 카톡 내용을 보낸 메일 확인하고 인쇄를 부탁했다. 대략 1500장 정도로 A4박스 하나를 가득 채운 분량이었다. 하루에도 2~300개씩의 카톡을 나누고 페이스톡, 보이스톡을 수도 없이 주고받았다. 도대체 일은 언제 하나 싶을 정도로 매시간 매분마다 서로에 대한 섹드립과 은밀한 대화가 이어졌다. 박스를 들고 바로 학교로 출근해서 연구실에 앉아 숨을 고르며 내용들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