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이대로 있다가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미칠 것만 같아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지영에게 전화를 했다. 아침에 모닝커피를 핑계로 지영의 집으로 갔다. 지영은 이사를 잘했는지 밤새 잘 잤는지...전화를 했는데도 안받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건성으로 수면제도 먹었고 이사하느라 너무 힘들어서 골아떨어졌다고 대답했다. 나의 부산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에 지영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연락 있었니?”
“아니! 전남편은 전화없어. 날 찾지도 않고 있어. 친정에 연락도 안했나봐. 눈치를 채고 자기나름대로 상간녀와 의논하느라 바쁘거 아닌가 싶어?”
“변호사는?”
“연휴 지나고 화요일까지 휴가래”
“이 바쁜 와중에...우리만 급하지...이 자식이 무슨 짓 할지 모르는데...”
“병원은 다녀왔어?”
“응. 의사가 말을 못하더라...내 말을 못믿는 눈치야. 약은 받아왔고. 다음주 화요일에 다시 가기로 했어.”
“그러게 이게 아무나 믿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그렇게 자상하고 성실한 전남편 모습으로 살더니 30년간 상간녀가 있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게다가 상간녀를 네가 사는 집 윗층에 두고 살았다니...난 이런 건 막장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어.”
“현실이 더 잔인해~ 난 그래서 막장 드라마 안봤는데”
큰 아들 희원에게서 카톡이 왔다. “엄마 차번호가 뭐지? 아빠가 묻는데...”
“지영야~ 이 자식이 내 차 조회해서 날 찾으려나봐...나 어떻게 해?”
“빨리 변호사에게 연락해봐. 근데 어떻게 와이프 차번호도 모르냐? 그게 정상이냐?”
최승연 변호사님께
방금 큰 아들에게 카톡이 왔는데, 제 차 번호를 묻더라구요. 아무래도 차적 조회를 해서 저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할까요?
메일을 보내면서도 빨리 답이 안오면 어떻게 하지...두려움과 공포감에 손이 떨렸다.
지영이 그런 내게 장을 보러가자고 했다. “너 이사하고 먹을 것도 없을테니 장 좀 보고 점심먹자..너 며칠째 밥도 제대로 안먹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배가 고프다는 생리적 현상조차도 기억나질 않았다. 지영에게 이끌려 지하 슈퍼에 가서 라면과 과일, 밑반찬 몇 개 사고 지영의 차를 타고 오피스텔로 왔다. 문 앞에는 내가 이마트에 주문해둔 세제과 휴지가 배달되어 있었다. 내가 그걸 주문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열고보니 장을 본 것들과 거의 비슷한 것들을 또 산 거다. 정말 내가 제 정신이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한 일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고 있다. 이러면 안되는데...정신 똑바로 차려야 날 28년간 속인 전남편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데...순간 겁이 났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이런 벌을 주는가 신이 원망스러웠다. 날 속인 그들이 날 조롱하는 동안 난 눈치도 못채고 열심히 돈 벌고 아이 키우고, 재테크를 위해 뛰어다녔다. 그들 둘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서 미칠 것 같았다.
마침 변호사에게 메일이 왔다.
“소송을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전남편은 아내가 우울증과 자살위험이 있으니 찾아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이 위치추적을 하더라도 바로 전남편에게 알리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모르는 번호의 전화도 모두 받으셔야겠네요. 경찰에게 가정문제로 집을 나왔고 전남편에게 소재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세요. 저는 화요일까지 휴가이니 그 이후 약속시간을 잡고 뵙도록 하겠습니다.”
옆에서 함께 메일을 보던 지영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우선 뭐라도 먹자고 장을 봐온 튀김과 잡채를 꺼내왔다.
“너 그래도 대단하다. 하루 만에 이렇게 안락하게 꾸며놓고...짐도 다 정리한거야?”
“응, 나 인테리어 하는거 좋아하잖아. 방안은 보지도 않고 계약했는데, 평면도만 보고 가구 주문하고 조립서비스 신청하고 일사천리로 진행했어. 이제부터 택배올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 아마 30개는 주문했나봐...나 그 사이에 아끼고 절약하느라 못 샀던거 다 주문했어. 전남편이 내가 뭐만 사면 뭘 자꾸 사냐고 구박했었는데...그 한을 풀려는 듯이 마구 샀어. 그년한테는 1900만원짜리 시계 사주면서 나는 10불짜리 장난감 반지 사줬잖아. 아마 날 우롱하려고 그런거 같애..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 애들 남자애들이고 많이 먹으니까 한달에 식비 100만원 넘게 드는데 그것두 너무 많다고 80만원으로 줄이라는 거야...그런 생각하면 ...나 미쳐겠어...”
“아니야...너 지금 아주 잘 하고 있어. 단 일주일 만에 이렇게 독립할 수 있는 사람 흔치 않아. 이제 변호사 시키는대로 해서 빨리 이혼해서 그 구렁텅이에서 나오면 되는거야. 그 새끼 정말 나쁜 새끼니까,,,맘껏 미워해도 돼. 조금만 감정을 차분하게 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려고 하면 되는거야...지금처럼”
지영이는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큰 용기와 위안이 되는지 모를꺼다. 지영이가 없었다면 난 아마 주저앉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한탄만 하고 있었을거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내가 지 엄마 빚갚고 허구헛날 전화해서 ‘개씨불랄년아~씨발년~, 쌍년아~ 돈가져오라고! ’ 하는 욕 다먹으면서 견뎠고, 지 아버지가 던지는 밥상 맞으면서 그걸 참고 살았는데. 네 할머니는 네 엄마가 빌려간 돈을 나더러 친정가서 가져오라며 매일 전화했고, 네 여동생은 자기 대학원 등록금 내놓으라고 욕하고 밤새 전화해서 결국 결혼기념일에 난 결혼반지를 팔고 적금 대출까지 받아서 돈 보내줬잖아..그런 고생은 나한테 다 시키고 넌 그년에게 몸과 마음과 돈까지 다 바치다니...네가 인간이냐? 너 그러면서 성추행하는 안희정, 박원순 욕하고 불륜 저지른 최태원이 나쁜 새끼라며 지랄한 건 연기였던 거지? 이런 위선자..이중인격자...네가 뭐 지킬박사와 하이드냐? 추악한 너의 변태적인 모습 내가 세상에 다 알릴거야. 내가 가만있을 줄 알고...이대로 가만 있진 않을 거야. 너의 그 운명적 사랑이라는 김경아년도 내가 가만 안둘거야...”
라고 소리지르고 악다구니를 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의 잔인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런 순간에도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는 나의 그 악다구니를 듣지도 않고 나가버릴꺼고, 바로 이혼을 하자하고 상간녀를 보호하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들은 11년간 이미 상간녀가 사는 미국에서 살림을 차리기로 계획하고 서로 간의 가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떨어져나올 방법들을 마련해둔 상태다. 나에겐 그들에게 대응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더 냉정해져야한다. 그렇게 나는 자유를 얻기위한 시간을 벌고 준비를 하기 위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