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를 먹어도 새벽 6시 반이면 기계처럼 눈이 떠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6시 반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밥은 전날 밥솥에 해놓았지만, 아침에 고기나 생선류를 구워야 한다. 전남편은 어린 시절 집안살림에 관심 없는 엄마 때문에 제대로 아침을 먹은 적이 없다고.. 그래서 제대로 된 아침상에 가족이 앉아서 밥을 먹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까짓 거 내가 조금 고생하고 조금 일찍 일어나서 고기를 굽고 계란말이를 하고 밑반찬과 김치를 꺼내고 밥을 푸고 국을 담으며 아이들을 깨웠다. 민우는 형보다 일찍 일어나서 스쿨버스를 타야 해서 힘들게 깨워 씻겨서 옷을 입히고 희원이는 밥냄새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소리를 한번 지르면 식탁에 와 앉는다. 시끄러운 소리에 전남편이 현관 밖 신문을 들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하면 나는 출근 준비를 했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음식냄새를 맡고 나면 쉽게 넘어가질 않았고 우선적으로 시간이 없었다. 헐레벌떡 옷을 챙겨 입고 화장을 하고 나서 민우가 이를 닦게 하고 차에 태워서 스쿨버스 정류장에 내려주고 인사를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아침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그러고 나면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전남편은 출근 준비를 한다. 전남편을 태워서 전철역에 내려주고 학교로 출근하는 1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전쟁 같은 아침을 벗어나 진정으로 나만을 위한 시간이 보낼 수 있게 된다. 전남편은 손하나 까닥도 하지 않는 전형적인 꼰대였고 나는 전쟁 같은 3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은 대체 휴일이라 새벽거리는 한가하다. 내가 집에 있었다면 그 전쟁 같은 속에 있었을 텐데, 지금은 문을 여는 가게조차 없는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다. 아침 일찍 문을 연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저녁에 후배 민정이 오면 카톡의 내용을 끝까지 읽고 나의 감정을 정리하고 전남편과 상간녀의 생각도 완전히 정리할 수 있을 거다. 며칠간 나머지를 읽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너무 적나라한 그들의 불륜과 나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이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으로 피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잠시 멈춰두었던 직면을 하려 한다. 변호사나 지영은 읽지 말라고 말렸지만, 이걸 끝내지 않으면 찜찜함이 나에게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카페 창가에 앉아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서로에게 얼마나 정직할까 궁금해졌다. 저들도 가족을 속이고 아내를 속이고 친구를 속이고도 저렇게 웃고 행복한 건 아닐까? 아니.. 웃으며 지나가는 저 커플은 부부일까? 불륜일까? 나의 바뀐 시각에 나도 놀라면서, 이제 아무도 믿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후배 민정이 일찍 도착했다.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들어오며
“어머 선생님~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예쁘게 잘 꾸며놓으셨어요? 엊그제 이사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나 집 꾸미기 좋아하니까 이런 거쯤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하루 만에 집 구하고, 이케아가구 주문하고 하루 만에 조립하고... 사람 사는 집 같아요?”
“네 너무 예쁘고 아늑해요. 정말 이런 능력 있는 사람을 속이다니 전남편분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그렇게 젠틀하고 선생님 아끼는 척하더니... 정말 누굴 믿어야 해요? 게다가 의사가 이렇게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걸 누가 알겠어요?”
후배 민정과는 이혼한 친구들과 주변 이야기를 하며 자료를 함께 정리하다가 11시 넘어서 잠이 들었다. 민정은 불편했을 잠자리에도 나를 위로하고 밤새 나의 넋두리와 한탄에 공감을 해주었다. 그녀와 혜원은 대학원 후배인데 지난 11년간 믿음직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늘 내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했다. 그런 그녀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는 것이 너무 두려웠지만, 민정과 혜원은 그런 나의 염려에 이렇게 답했다.
“지금 선생님이 이렇게 이성적으로 잘 대처하고 계신 모습도 너무 멋져요. 저라면 이러지 못할 것 같은데... 정말 엄청난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에 일처리 하시고 변호사 선임하시고, 빨리 피신해서 거처 마련하시고... 나쁜 건 전남편이죠. 선생님에게 닥친 불행에 주저앉지 않으신 모습이 아직도 저에겐 롤모델이에요.”
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굴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