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사 Jan 16. 2024

벗어나고 싶어요!

민정과 일어나서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먹고 서울로 출발했다. 오늘 코로나 백신예약을 해 놓은 상태인데 이 정신에 맞으러 가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내가 건강하게 있어야 재판과정을 잘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전남편과 상간녀의 바람대로 되지 않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자고, 내 일상으로 빨리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신을 맞고 정신과 진료 예약도 있었기에 택시를 탔다. 예전이라면 버스나 전철을 타며 조금이라도 돈이 덜 드는 방법을 택했을 텐데 지금은 내 몸이 편한 방법을 택하는 게 현명할 거라는 생각에 택시를 잡아탔다.


병원 대기실은 한가했다.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20대 여자 환자 한 사람만이 모자를 눌러쓴 채 소파 깊숙이 앉아있었다.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정수기에서 물을 한잔 마시고 소파 한쪽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그 사이에 민경과 지영의 걱정하는 문자가 와 있었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좀 잤는지, 후배는 와서 좀 도움이 되었는지 등등


어제는 후배와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고 함께 아침을 먹었고 병원에 와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답을 쓰고는 주변을 둘러보니, 갑자기 너무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ㄱ자 소파와 2020년도 낡은 잡지가 있고 한쪽 구석에는 정수기가 놓여있다. 꾸미거나 가꾼 흔적보다는 오래된 낡은 역사를 보여주는 곳 같았다. 한쪽 벽면에 쓰여있는 트라우마센터라는 커다란 글이 눈에 와 박혔다. 그 글이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의료진 약력과 함께 신문 기사와 잡지 기사들이 붙어있고, 코로나에 대한 안내 포스터도 있다. 첫날은 내가 어떤 곳에 어떻게 왔는지 조차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지도를 다시 찾아서 와야 했다. 내가 이곳을 왔었다는 기억조차도 나질 않았다.


‘아하! 난 지금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구나!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 두려움, 공포, 배신감과 억울함 이런 게 모두 트라우마로구나... 난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지? 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에선 이성이 외치고 이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하라고 하는데, 마음은 도저히 그걸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진료실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주치의는 내게

“잘 지내셨어요?”

“네.. 약 먹고 잠도 좀 자고, 조금 덜 불안했어요.”

“5일 동안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지난 5일간 호텔을 전전하고 오피스텔을 구하고, 이사를 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이야기 정말 전남편에게 알려지지 않는 거죠? 제가 좀 불안해서... 소송준비하고 있지만... 그전까지는 숨어있고 싶어요.”

지난번 초진에서 불안하게 뛰어들어와서 횡설수설 급하게 떠들던 모습을 기억하던 의사는

 “지난번 보다 많이 차분해지셨네요.”

“네.. 이 정도의 감정선이 저의 모습인데, 그날은 많이 불안했죠?”

“그런데 지난번에 하고 가신 MMPI 검사상에 피해망상 점수가 너무 높게 나와서 좀 걱정이네요.”

“어떤 항목에 대해서 그렇게 나왔나요?”

“누군가 나를 독살할 것 같다는 항목에 예라고 체크를 하셨더라고요..”

나는 가방에서 카톡 내용을 프린트한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전남편과 상간녀가 ‘지수에게 매일 조금씩 독약을 먹이는 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독약을 사야겠다 ‘, ‘내가 누릴 것들을 다 뺏어간 지수를 죽이고 싶다’라고 하는 대화 내용을 의사에게 내밀었다.

“제가 이 내용을 보고 무서워서 그날 집을 나왔어요. 전 정말 제 상태가 너무 힘들고 조절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솔직하게 작성했어요.”

“이걸 보니 이해가 되는군요.”

“지금 혼자 나와 계신 거면, 친정 식구들에게 알리고 함께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친정 부모님께 알리면 어떻게 하실 것 같으세요? 분명히 전남편 병원으로 쫓아가서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너와 네 부모들이 내 딸한테 막말하고, 허구한 날 이혼하라며 괴롭히고 돈 사고 쳐서 그 고생을 시켜놓고, 이제 와서 바람이 나서 내 딸을 힘들게 하냐며 난리를 치시겠죠? 그러면 제게 도움이 될까요?”

“그렇네요. 그럼 지금 혼자 계신 건 힘들지 않으세요?”

“일단 친한 친구가 가까이에 있고, 학교에 친한 교수님들이 많이 걱정해 주시고 도와주세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시궁창 같은 시부모에게 정서적, 언어적 학대를 당하고도 결혼을 유지하고 살고 있었는지를 너무 잘 아시는 분들이라 많이 위로받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

“이혼해야죠. 술 먹고 두들겨 패는 시아버지와 사기치고 돈 들고 날라서 일 년에 12번씩 이사 다니게 하는 시어머니가 제게 원한 건 늘 돈이었어요. 개씨부랄년, 쌍녀, 시팔년이라고 욕하면서 돈가 져 오라고 할 때도 그저 전남편만 바라보고 참고 살았어요. 그런데 전남편은 그렇게 당하는 나를 별달리 보호하지 않고 피하더라고요. 자신의 치부를 다 아는 나에게 무안해할까 봐, 그런 전남편이 불쌍하고 안쓰럽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따뜻하고 안정감 있는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카톡내용을 보면서 알았어요. 전남편의 상간녀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 연인이었고 시어머니에게 소개를 했다가 그 여자가 기겁을 하고 미국으로 도망간 거였어요. 그게 늘 아쉽던 차에 소개로 나를 만나게 되었고 그런 시부모의 학대를 내가 잘 버텨주니까 결혼까지 한 거죠. 거기에 대해 전남편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지수는 책임감이 강해서 좋아. 난 도망갈 줄 알았는데,,, 우리 엄마 알잖아.. 얼마나 심한지.. 그걸 버티더라고. ’ 제가 방패막이였던 거예요. 전 그 놈들이 겁나 도망간 걸 온몸으로 막아주고 그 연놈들이 놀아나도록 돈을 벌어다주고 살림을 살아주고 애를 낳고 집을 지켜주는 개였던 거예요. 이제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요.”

“네 그러셔야죠.”

의사는 아무 말없이 그저 내 눈을 바라봤다. 나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을 만큼 안정이 되었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너무 침착하고 차분하셔서 제가 할 이야기가 없네요. 약은 그대로 지어드리면 될까요?”

“네.. 마지막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어요.”

“선생님은 이런 인간이 의사로서 적절하다고 생각하세요?”

의사는 당황해서 그저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의 침묵을 지나

“글쎄요. 의사는 그저 직업이고, 사생활은 다른 거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했나 보죠. 다음 주에 뵐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