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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Jan 23. 2024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밤늦게 수면제를 먹고 자도 6시면 눈이 번쩍 떠졌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우울증 약을 챙겨 먹고 커피까지 마셨는데 8시도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일을 만들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5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엔 할 일도 없었다.


비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우산을 챙겼는데 희원이 함께 간 여행에서 산 은색 비옷은 입고 싶지 않았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을 위해 산 거였고, 너무나 마음에 드는 옷이었는데. 전남편이 내가 올린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경험 이야기를 듣고 똑같은 옷을 상간녀에게 선물한 사진을 본 순간 ’이런 변태새끼!‘라는 생각이 들자 그 옷을 보면 기분이 나빠졌다.


이런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오래 고민하고 산 발뮤* 토스터기와 전기포트를 보고는 바로 상간녀에게 배달을 해주었다.


또, 오렌지색을 좋아하는 나는 크로스로 걸 수 있는 핸드폰 줄을 샀는데, 당시 전남편이 이쁘다면서 자기도 하나 사보려고 하니 링크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똑같은 줄을 상간녀와 상간녀의 후배에게까지 사서 보냈다.


더욱 어이가 없는 일은 코로나 때문에 교수들이 추천하던 면역 비타민을 전남편과 둘째 민우를 위해 샀다.


가격이 좀 비싼 편이어서 나와 희원이는 나중에 사 먹기로 하고 전남편과 수험생인 민우에게 먼저 먹이기 시작했다.


교수들의 말에 따르면 그 비타민을 먹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효과가 좋다고 해서 먹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서 전남편에게 물었다.


“정말 눈이 번쩍 띄게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그냥 그렇다고 데면데면하게 답하던 전남편에게 그래도 코로나에 좋다니까 다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상간녀와의 카톡의 내용에서 전남편은 내가 사준 그 비타민을 먹으면 상간녀와의 섹스가 더 간절해진다며 먹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그에 대해 상간녀는


 ‘지수가 알아차린 거 아니야? 어떻게 해.. 상훈 씨 조심해요'


라고 했고 전남편은


‘난 그래서 안 먹어야겠어. 그래도 경아는 꼭 챙겨 먹어!’

라고 했다.


전남편은 상간녀에게 이미 똑같은 비타민을 사서 보낸 것이다.


그러면서 상간녀가

 ‘지수가 자꾸 달려들면 어떻게 하느냐’

고 묻는 말에 전남편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수는 이런 거나 사면서 평생 참고 살라고 해. 경아는 신경 쓸 것 없어! 경아는 내가 보내주는 태반주사 잘 맞고, 비타민이랑 약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아야 해”     


그 글을 읽으며 나는 모멸감과 치욕감을 참을 수 없어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난 그들에게 그저 좋은 물건을 안내하는 퍼스널 쇼퍼였구나. 그렇게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보 같은 내가 부끄럽기까지 했다.      


전 전남편은 상간녀와 함께한 뉴욕 여행에 내가 쓰던 모자를 가져가서 상간녀에게 그 모자를 씌우고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도무지 무슨 심리로 나와 똑같은 물건들을 사주고 상간녀는 그런 걸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라 하며 내 흉내를 내고 다녔을까?  


무슨 아바타도 아니고 자신의 소신이나 취향도 없이 나만을 그대로 따라 하는 그 심리를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남편은 상간녀가 한국에 오면 머물 거처를 우리 집 주변에 마련해 주고 함께 백화점 쇼핑을 다녔다.


그러면서 조금 미안했는지 평생 그런 적도 없던 갈색병 세럼을 사다 준 것이다.


난 왜 주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비싼 걸 사다 주다니 너무 고맙다고 했는데, 상간녀는 화장품 세트를 다 사주고 나에겐 그중 하나를 거지에게 동냥하듯 준 거였다.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 은색 비옷을 보면 전남편의 그 파렴치한 행동들이 함께 떠올랐다.


지영이와 여행을 가기 위한 짐을 챙기면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재수 없고 기분 나빠서 버리고 오려고 했지만,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서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인데... 내가 왜? 하는 마음으로 다시 챙겼지만, 막상 입으려니 또 마음이 산란해졌다.


변호사에게 물어보니 그 독촉장에 대해서는 소유주로 되어있는 내가 변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은행에 가서 30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내면서 나는 너무 억울했다. 그 사이 부동산에서 가격이 오르면서 전세금이 올라가면 모든 돈을 전남편계좌로 실시간으로 바로 보내줬다.


본인이 강력하게 원했고 그 돈으로 이자를 내고 조금이라도 원금을 갚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기에 나는 바보같이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나로서는 타당하다고 생각했고 전남편을 믿었기에 그렇게 했는데 원금이나 관리를 위한 비용이 아니라 상간녀의 차와 생활비로 다 쓴 거였나 보다.


상간녀에게는 돈을 주고 나에게는 빛을 주는 전남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내가 그를 돌보고 있던 사이에 그는 상간녀를 돌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런 사실을 10년 넘게 모르고 산 내가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인간을 그렇게 신뢰하고 믿었단 말인가? 심지어 남들에게 전남편을 존경한다고까지 한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300만 원이 넘게 밀린 상가 관리비를 은행에서 내고 나오는데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가 은색 비옷을 꺼내 입었다.


‘내가 뭐가 무서워서 내 옷을 못 입어. 내 돈으로 내가 먼저 사서 입을 걸 보고, 그년이 따라 입은 거니... 그년이 기분 나빠야 하는데...

그년은 나하고 똑같은 거 입고 나랑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포즈 취하면서 마치 나인 것처럼 구는데... 날 질투하고 날 동일시하는 건데, 내가 피하면 안 되지.’


다짐을 하고 비옷을 챙겨 입고 지영이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나도 모르게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바보처럼! 바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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