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희원이가 보내온 카톡에는 K시의 상가에 밀린 관리비에 대한 독촉장이었고, 미납 시 법적 조치를 한다는 법원의 문서였는데, 전남편이 나에게 전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사이 부동산에서 전세금을 올려줄 때마다 모든 자금을 전남편에게 보내주었는데 그깟 300만 원을 내지 않아서 나에게 이런 문제를 떠넘긴 것이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모든 돈은 상간녀에게 보내고 나에게는 빚과 이자만을 떠넘기고 본인은 영주권을 받아서 상간녀의 옆으로 가려는 게 그의 계획이었나 보다.
파면 팔수록 나는 수렁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아본 적 없는 부모와 형제, 28년을 속인 전남편.
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을까?
변호사는 상가 관리비는 내 명의로 되어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내 돈으로 해결하고 상가를 매물로 내놓고 적당한 가격에 매각을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상가전체가 공실이 너무 많고 뉴타운 조성을 위해 주변이 다 이사를 가버린 상태에 경기도 좋지 않아 쉽사리 매각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제 더 무슨 일이 생길까? 이 정도면 되겠지 했는데, 점점 어렵고 힘든 일만 생기고 내가 몰랐던 사실들에 놀라움의 연속이다.
8월 그날 전남편의 불륜을 확인하고 나는 지하 30층쯤으로 뚝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올라가 보려고 힘을 내면 언니가 쇠몽둥이로 머리를 때리고 엄마가 다리를 부러뜨리고 가족이 날 더 힘들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딸, 동생에게 이렇게 무자비할 수 있다니...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어제 보내지 못한 1400만원을 내일 일찍 아버지 계좌에 넣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첫 끼로 샐러드를 준비하고 있는데 지영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내일, 모레 뭐 하니? “
“글쎄 집에 있겠지 뭐... 부모님 용돈계좌 없앤 거 때문에 어제 언니가 지랄해서... 변호사한테 이야기했더니 왜 그랬냐고.. 그러다 자금 빼돌리는 거로 오해할 수 있는데.. 작은 일들은 의논 잘하면서 이런 큰 일은 왜 그렇게 처리했냐고 그러더라.. 내가 큰 실수를 했나 봐. 너도 알잖아.. 우리 언니랑 미영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내 걱정보다는 이기적으로 자기들만 챙기니... 내가 그걸 못 견디겠나 봐. 지금 내가 너무 힘드니까 충동적으로 처리해 버린 거야. 내일 당장 아버지 개인 계좌로 보내드리라고 해서 아침 일찍 은행에 가서 입금해드리고 나면 별일은 없어..”
“그럼 나랑 같이 부여 가자... 너도 바람도 쐬고.. 주말까지 별일 없으면 혼자 있는 거 보단 그게 나을 거 같아...”
“그래... 고마워”
별생각 없이 가겠다고 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왠지 소풍을 앞둔 소녀처럼 설레었다. 지옥 같은 현실을 잠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무얼 챙겨야 하는지 이리저리 짐을 싸고 나니 12시가 넘었는데도 잠이 오질 않고 점점 말똥말똥해져서 못 먹는 술을 먹어보려고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냈다.
평소 이슬 톡톡 한 캔만 먹어도 해롱해롱 해지는 나를 보고 민우는 정말 웃긴다고 했고 희원이는 신기하다고 했었다. 그 정도만 먹어도 엄마는 새 빨게 지고 혀도 꼬이고... 그런데 맥주 한 캔을 다 마셔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은 배가 허기를 느끼게 했다. 사발면 하나를 끊여서 맥주와 함께 먹으면서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내가 자고 싶을 때 자는 이런 자유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의 취기가 올라온 중에, 변호사를 소개해 주신 박지은 교수님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어떻게 지내? 밥은 먹었어?"
" 아뇨 오늘 하루종일 수업이라서, 한 끼도 못 먹고 이제 맥주 한 캔 마셨어요...”
“술도 못 먹는 사람이 그러면 안돼... 긴 싸움이 될 텐데 잘 먹고 벼텨야지. 희원이, 민우 생각하고 챙겨 먹어”
“소송은 잘 진행되고 있어?”
“너무 이거 저거 터지는 게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어요.”
오늘 하루 동안에 터진 일들만 이야기하는데도 전화기 너머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잘 먹고... 이거 하나만 기억해. 선생님!...남편 무서워하잖아. 남편을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 인간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까.. 겁먹지 말고 용기를 내야해. 애들들을 위해서라도....알았지? 수면제 너무 많이 먹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