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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Jan 24. 2024

유전일까?

아침부터 날씨가 흐린 채, 일기예보는 가을장마와 폭우에 대비하라는 예보를 했다.


그 사이 세상 돌아가는데 너무 아는 게 없어진 것 같아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틀어놓고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워낙 작은 방이라서 치운다고 해도 별로 치울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는데도 8시밖에 되질 않았다. 병원까지 한 시간이 걸리니 10시에 나가도 충분하고 앞으로 2시간 동안 무얼 해야 할까?


좁은 방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개어놓은 옷을 다시 꺼내고 몇 개 없는 잔을 다시 씻어도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일찍 도착한 병원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이 많은 간호사는 30분이나 일찍 왔다고 눈치를 주지만, 다른 곳에서 기다렸다가 오기도 귀찮아서 대기실에 앉아서 멍하니 아들의 문자를 다시 보았다. 어젯밤 아들은 전남편과 술을 한잔하면서 아빠의 마음을 떠봤다고 한다.


“엄마랑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라는 질문에

“모른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모르는데, 나는 어릴 때 엄마가 집에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나간 적이 있어서 가족이 집을 나가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래서 지금 엄마가 나간 게 이해도 안 되고, 잘못한 게 있으면 대화로 풀던지 직접 푸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간 것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용서가 안된다.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라고 했다고 한다.


병원 상담을 하면서 지난주 목요일부터 계속 토하고 설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에 있었던 언니의 폭언과 아버지의 이야기와 전남편이 서둘러 영주권을 신청해서 상간녀의 옆을 가려고 서두르고 있으면서 아들들을 속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일단 전남편이 영주권을 신청해도 성년인 두 아들은 함께 갈 수 없고, 두 아이의 여권이 모두 나에게 있는데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말이 모두 거짓말인데... 그런 거짓말로 아이들을 속이고 자기만 이 상황에서 도망가겠다는 야비함을 보이는 것에 치가 떨리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면서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지, 잘 먹고 건강하게 버티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아서 힘들다고 했더니 의사는 지금 최대의 스트레스 상태이니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약을 조금 바꿔주고 밤에 잠을 좀 더 깊이 잘 수 있도록 낮의 약을 밤에 먹으라고 했다.


방을 나오면서 의사에게 물었다.

“아직 전남편은 내가 자신의 불륜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소장을 받고 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아마 최선을 다해 최악의 대응을 할 것 같은데, 모든 증거를 다 가지고 계신 거죠?”

“그럼요, 2년 치 카톡이 1500장이 넘게 있는걸요.”

“아하.. 네 대단하시네요.”     


큰 아들과의 약속이 있어서 허겁지겁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들도 그 사이 마음고생을 했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뚱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살이 빠져 보였다. 식당가로 가면서 메뉴를 정하는데, 고기를 먹자고 했더니 며칠 동안 장염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무언지 몰라도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팠다. 둘 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죽집에 들어가서 전복죽을 시켰다. 오랜만에 맛있게  먹는 걸 보니 행복했다.


“어젯밤에 아빠가 고기를 사 와서 민우랑 석우 데리고 와서 고기 구워 먹었어요. 내가 요리하고 치우는 건 민우가 더러 하라고 하고 올라왔는데, 그냥 물에 담가만 놓으라고 했는데 다 치웠더라고요. 자기가 그냥 그렇게 두면 분명히 엄마가 한참 뭐라고 잔소리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니까 치우고 싶더래요. 민우도 엄마 보고 싶어 하고, 미워하지 않아요.”     

그 말에 입 안에 있던 죽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고, 울꺽한 마음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점심을 먹고 큰아들의 첫 차를 보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빨간색 마티즈의 이름은 “딸기”라고 웃는데 나도 웃음이 나왔다. 이런 큰 덩치를 저런 조그만 차에 구겨 넣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자기가 산 첫차라서 좋다며 오늘 세차도 하고 왔다고 웃고 있다.


며칠 전 전남편이 큰아들에게 차를 사주겠다고 했다고 해서 웬일인가 했다. 아들들에게 그렇게 인색한 전남편이 아들의 가장 큰 소원인 차를 사주려고 한다는 건 아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나 보다 해서 그래도 완전히 아버지로서 포기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차  안 준다고 해서 내가 준 비상금에 100만 원과 자기돈 70만 원을 합쳐서 17년 된 중고 마티즈를 샀다는 문자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


전남편은 늘 돈으로 사람을 조정했다. 본인이 궁색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아서 자신에게 굴복하게 하는 야비함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늘 내 월급으로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해야 했다. 단 한 번도 기분 좋게 선물을 사준 적 없었고, 심지어는 내 생일날 '아름다운 가게'로 데려가서 선물을 고르라고 했다. 생활비도 늘 부정기적으로 병원에 들어오는 현금 만을 주었다. 어떤 달은 부족해서 내가 돈을 좀 더 줘야 아이들 교육비를 내야 한다고 하면 짜증스러운 얼굴로 뭘 그리 많이 쓰느냐고 난 돈 많이 쓰는 게  제일 싫다고 했다.

그런 그가 상간녀에게 ‘실용성 생각하지 말고 사고 싶은 거 다 사’, ‘경아가 원하는 건 다 사줄 거야.. 그게 무엇이든’이라며 1900만 원짜리 카르티에 시계와 티파니 목걸이, 다이아몬드 귀걸이, 밍크코트를 사줬다는 글을 보며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28년 전 나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하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나는 도대체 누구와 산 걸까? 이렇게 살려면 그도 참 힘들었겠구나... 마치 지킬 앤 하이드처럼 다른 인격으로 살았어야 했으니...     


보통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서 상간녀와 만나고 오면 본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잘해준다는데, 이 남자는 시종일관 상간녀에게는 잘해주지만, 본처를 구박하고 자기 아들들을 속이고 상간녀 아이들에게 교육비와 좋은 선물로 호감을 사려하고 있었다.

      

큰아들의 차는 힘겹게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둘만 탔는데도 덜덜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뭔가 기념으로 사주려고 했더니 핸드폰 알리미가 필요하다고 해서 다이소에서 하나 골랐다.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가득 넣으라고 카드를 주었다. 이 정도는 엄마도 아직 해줄 만하다고 했더니 미안한 얼굴로 기름을 가득 넣고 경차라서 기름도 적게 먹고 주유비랑 톨비도 적게 나온다고 자랑을 하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이 함께 한강 고수부지에 주차하고 이야기를 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자기는 큰 거 바라지 않는다고 엄마, 아빠의 재산도 바라지 않았는데 이번 일 보면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빠가 그 여자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다는 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이거 다 엄마가 한 건데.. 왜 그 여자한테 줘야 하냐고..


“나 만나는 여자친구 있다고 했잖아요.. 그 친구가 이번 일 들으면서 그런 유전적 기질이 흐르는 거 아닌가 걱정하더라고...너네 할아버지 그렇고, 이번엔 아버지까지..”

엄마로서 가슴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렇지만 너한테는 엄마 유전자도 50프로 이상 흐르잖아.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고지식하고 외골수고 하나만 생각하는 사람이잖아.. 너희에게도 아빠에게도 최선을 다했고, 난 단 한 점 부끄러운 짓 한 거 없어. 넌 엄마를 닮아서 그러지 않을 거고..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이나 너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할 거라고 해.”      


희원이는 순하고 감정표현이 없는 아이인데도 얼마나 힘들면 먹지도 못하고 저렇게 고민할까? 차라도 사서 좋아하는 드라이브 하면서 스트레스를 좀 해소했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전철 속에서도 희원이의 걱정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긴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데, 내 주변은 마음같이 빨리 정리되고 있지 않아 기다림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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