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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사 Jan 25. 2024

신이 내게 바라는 것은?

수면제를 먹고 아무리 늦게까지 잠을 자려고 해도 새벽 6시면 눈이 떠져 버린다. 의식 없이 잠을 자는 게 생각을 멈추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 눈을 뜨고 해를 보는 게 두렵기만 하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워낙 작은 원룸이라서 청소기를 돌려봤지 5분이면 끝나고 대걸레를 들고 걸레질까지 하는 청소는 15분이면 끝이 난다.

어제도 닦은 서랍장을 또 닦고, 이전 세입자가 묻혀놓은 벽지의 먼지까지 닦았는데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포트의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무화과 1개를 씻어서 암체어에 앉았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유튜브 재즈를 연결해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며 안정감을 찾으려고 눈을 감았다.


수업 전까지 3시간이 남았지만, 이미 모든 준비를 다 해놓았는데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어제도 막상 수업을 시작하면 나의 지식이 총출동하고 집중하게 되어서 잠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자신감이 떨어지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심을 하게 되고 불안해져서 항불안제를  한 알 먹었다.

내가 20년 넘게 하던 일이고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도 내가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내가 피해자이고 이상훈, 김경아가 가해자인데 왜 내가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모든 사실이 밝혀져도 내가 오히려 사람이 무서워서 숨고 싶어 질 것 같고, 뻔뻔한 그 둘은 당당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니 울분과 화가 나서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 든다. 매일 이런 생각과 감정의 동요 때문에 일상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성은 알면서 감정은 나의 통제를 벗어날 때가 많다.


수업을 시작하니, 먹은 게 없어서인지 힘이 들었다. 몇 일째 먹고, 토하고 다시 먹고 설사를 반복하다 보니 온몸의 힘이 없음을 느낀다.


몸무게가 10kg 정도 빠지고 나니 모든 일에 무기력하고 숨이 벅찼다. 내과에 가서 링거라도 맞아야 할까? 겨우겨우 수업을 끝내고 방을 뛰어나왔다.

좀 신선한 공기를 쐬고 싶어서 비 오는 거리로 나가 무조건 아무 방향으로 걸었다. 신발이 젖고 바지가 젖는 것도 잊고 1시간 정도를 여기저기 헤매고 돌아다녔다. 비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비 오는 날은 문밖도 나가지 않으려고 했던 나인데, 지금은 어딘가 가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좋아하지도 않는 고기를 샀다.


 토하는 한이 있어도 고기를 먹고 힘을 내자 싶어서 고기를 구워서 5조각 정도를 먹었다. 몇 조각이 더 남았지만,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오후에 최승연 변호사와 함께 일하는 김지은 변호사라는 소개와 함께 소장의 초안과 분할대상제산 명세표가 메일로 도착했다. 급한 일들을 끝내고 소장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내가 소장이라는 것을 작성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인생에 법은 멀리 있고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 게 인생인가 보다.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내 삶을 곱씹어보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참고 살았을까? 무얼 바라고 그의 변화된 모습과 태도에도 희망을 걸었던가?


최근 들어 전남편은 내가 하는 말에 늘 윽박지르고 꼬뚜리를 잡고 신경질을 부렸다. 눈마저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고 집에 오면 맥주나 와인을 먹고 거실에서 일찍 잠들어버렸다.

마치 나와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런 그와 나의 나머지 삶을 함께 할 시간을 기대했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그 모든 것을 참고 내가 그를 돌봐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에게는 제대로 된 부모 형제도 없으니 내가 마지막까지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소장의 마지막까지 읽고 그와 상간녀 간의 시간과 증거제출목록을 보며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10장의 종이 속에 나의 28년간의 결혼생활의 억울함과 분노를 다 담을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그 안에 담긴 손해배상액 1억 원으로 나의 시간과 노력과 사랑과 눈물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나마 내가 1억원을 청구해도 5000만원 이상 받기가 어려운게 현실이란다.


그와 그녀가 기껏 1억이라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면 이제 자유로이 자신들의 부정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인가?


도무지 도덕과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울분에 소장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용도 폐기된 가전제품처럼 나는 이제 효용성 없는 쓰레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억울함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시궁창 같은 시부모의 폭언과 폭행에도 참았고 돈을 요구하면 그 돈을 마련해 주고 이자를 갚느라 임신 9개월까지 직장생활 후에 밤에는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악착같이 버티고 울고 아파하면서도 함께라는 것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인내하고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처절했다. 참고 인내해서 재산을 불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억세고 거칠어진 손과 마음은 이제 필요 없으니 꺼져버리라는 거구나.


세상은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도망갈걸... 아니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면 진즉에 포기했어야 했다.


난 그가 인생을 좀 더 편하게 버티기 위해 잠시 고용된 방패였고 이제 부서지고 약해져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신은 과연 있는 것일까? 신이 있다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내게 벌어진 일들을 의심하며 소장을 수정하고 변호사에게 회신했다.


오늘 밤은 더더욱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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