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춘기 일기
밤새 잠을 뒤척였다.
남편까지 못 자는 것 같아서 거실로 나왔다.
5시가 넘은 시간, 이렇게 정신이 말똥말똥하다니.
조금의 두통이 있을 뿐 정신은 말짱하다.
1주년 결혼기념일이 되는 날 아침이다.
남들이 흔히 부르는 결기라니...
마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결혼한 나로서는 낯설기만 한 기념일이다. 아, 태어나 처음 맞는 기념일구나.
진부하지만 시간 참 빠르다는 말을 한번 더 실감하면서 1년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열심히 결혼 준비를 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퇴사에 이사까지 사건이라면 사건 일 수 있는 인생의 큰 일들이 휘몰아쳐 지나갔다.
그리고 시작된 낯선 동네에서의 생활, 주말부부, 퇴사 이후의 비어버린 공백들...
나는 지금 적당한 쉼을 위해 비우고 있는지 모를, 혹은 채우고 있을지 모를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퇴사하고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몸이 근질근질하다.
지긋지긋하다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온 회사인데... 물론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세상과 단절되어 버린 느낌,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는다.
더불어 낯선 동네에서의 생활은 낯가림이 심한 성격 탓인지 화성에 온 지구인처럼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이러다 영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지.
18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가 컸던 탓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퇴사를 하기만 하면 숨을 조금 쉴 것 같았는데, 푹 쉬면서 해보고 싶은 일들을 실컷 하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했는데
막상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 앞에 바보가 된 느낌이다.
막연한 마음에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부터 빌려왔다.
(연애도 글로 먼저 배우는 스타일이라;;)
나는 지금 촘촘한 루틴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 압박을 느끼면서 머릿속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만 많은 철없는 마흔 살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지는 몰라도 아직 배우고 싶고 세상에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늘 배움에, 부족함에 목마르기 때문일까.
다만, 배움 앞에 한 가지 다짐이 있다면 앞으로 내 인생에서의 배움은 완성에 두지 않기로 했다. 아... 그동안 완성된 배움도 없었지만...
아무튼 난 배움의 과정 자체를 즐겨보기로 했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과정을 즐기고 그냥 지금의 여유 모두를 즐길 수 있는 나라면 만족스러울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더 나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언제까지 여유 있게 쉴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잘 써볼걸 하는 후회가 남지 않기를 바란다.
남편은 아직 밤의 기운을 느끼며 자고 있고
나는 루이보스티를 마시며 여유를 갖는다.
참 평화로운 1주년 결혼기념일의 아침이다.
지금, 이 마음의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