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Dec 02. 2021

오드리 헵번 같은 손님 어디 없나요?

나잇값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오드리 헵번을 좋아한다.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그 상큼 발랄함을 좋아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Moon River'를 부르던 그 목소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가 오드리 헵번을 최고의 배우로 기억하게 된 계기는 은퇴 후 그녀가 살았던 삶을 보면서였다.


한때 세기의 연인으로 불릴 정도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톱스타였지만 그녀는 촬영 때 받은 협찬 의상을 그대로 돌려주고 평소에도 아이들 식사를 직접 준비할 정도로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기품'이란 단어를 꼭 한 번만 사용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을 오드리 헵번에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신 접종이 전 연령대로 확대됨과 동시에 한때 타이레놀이 품귀 현상을 빚은 적이 있다. 아세트 아미노펜 성분이 들어 있으면 다른 진통, 해열제도 무방하다는 뉴스가 연일 이어졌지만 익숙해진 상표가 아닌 이상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이 통할 리가 없었다. 오로지 타이레놀만이 진리이자 특효약 대우를 받았다. 당연히 그 여파는 우리 가게에까지 이어졌고 입고 수량 제한이 걸린 타이레놀은 들어오기 무섭게 불티나게 판매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6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할머니(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셔서 타이레놀을 찾으셨다. 늘 하던 대로 의약품 진열대 쪽으로 안내를 드리고 카운터에 서 있는데 이 분이 진열되어 있는 타이레놀을 모조리 담아 오시는 게 아닌가.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설전이 이어졌다.


"어머님, 하나밖에 못 사시는데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내 돈 내고 사겠다는데."


"그게... 약품 오남용 문제가 있어서 약국 이외, 그러니까 편의점 같은 곳에서는 1인당 하나만 구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팔고 싶어도 바코드가 정상적으로 스캐닝이 안됩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줘. 우리 둘만 알면 되잖아. 어디 가서 말 안 할게. 젊은 사람이 융통성 없게시리"

죽어도 사야겠다는 고객과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막아야 하는 판매자의 설득이 계속되었다.(세부적인 대화는 생략)


"어머님, 이건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고 합법이냐 위법이냐의 문제입니다. 제가 법을 어기면서까지 팔 순 없지 않습니까? 결제 내역이 전산으로 다 기록되는데 어떻게 둘만의 비밀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인근에 다른 편의점도 있고 근처에 약국도 많으니 번거로우시더라도 거기서 사시죠."

"거참... 젊은 사람이 말이 안 통하네. 약국에서 팔았으면 내가 이 비싼 데까지 왔겠어?"


"어머님, 저희 입장도 생각해주셔야죠."

"아 됐어요. 알았으니까 그냥 줘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제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고객은 분이 덜 풀렸는지 나가면서까지 뒤를 돌아보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셨다.


"내가 말이야. 창원 OO협회 회장 되는 사람이야. 여기 얼마나 법을 잘 지키면서 장사를 하는지 내 똑똑히 지켜볼 거야."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손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서글프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융통성이란 건 써야 할 때 쓰는 거지 왜 저리 막무가내일까 하는 생각에 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 100세 시대를 맞아 나도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돈 셈이다.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젊은 시절엔 느낄 수 없던 많은 감정들이 들 때도 있고 생각이 많아지기도 한다.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중 하나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젊을 땐 그저 노후에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그 옛날 오드리 헵번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남은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드니 점점 힘에 부치기도 하고 새롭게 진입하는 젊은 경영주들의 아이디어를 못 따라갈 때도 많다. 20년 넘게 장사를 하며 수십 아니, 수백만명의 고객들을 만났지만 아직 오드리 헵번이 아프리카 오지 마을을 방문했을 때 지었던 그런 미소를 가진 고객은 만나지 못했다.


10~40대가 주 고객층이고 50대 이상 여성 고객의 방문이 극히 드문 편의점에서 연세 드신 여성 분을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은퇴하기 전에 꼭 그런 미소를 가진 멋있고 단아하고 기품 있게 나이 든 고객을 꼭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다.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는 손이 두 개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돕기 위해서이다.)

오드리 헵번이 살아생전 좋아했던 시인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 마지막 구절을 또 한 번 되새기며..



메인 사진 출처 : 2012년 카쉬 사진전 때 구입한 기념엽서 촬영

매거진의 이전글 미안해, 형이 학력고사 세대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